[기자의 눈]윤영찬/동교동 난파선 탈출극

  • 입력 2001년 12월 19일 18시 02분


날로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진승현(陳承鉉) 게이트’는 과거 우리 정치권에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일 연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직 국가정보원 2차장과 경제과장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친인척까지 들먹이면서 ‘나를 건드리면 다친다’는 식의 협박으로 수사 중단 압력을 가했다는 보도는 야당 인사들마저 아연케 하고 있다.

한 야당의원은 “DJ 주변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도 심각한 상황이지만 정보기관 핵심간부란 사람들의 이런 행태를 보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린다는 생각이 든다”고 탄식했다.

또 다른 진풍경은 진승현씨 사건의 불똥이 정치권, 특히 여권 핵심부로 튀자 너나없이 “난 아닌데…”라며 은근히 정적(政敵)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광경들이다. 특히 김 대통령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던 측근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떠넘기기’ 공방은 안쓰럽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실제로 기자에게도 몇 가지 제보가 들어왔다. A씨는 “최택곤(崔澤坤)씨가 누구와 친한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며 Q씨를 지목했고, B씨는 전화를 걸어 “김은성(金銀星) 전 국정원 차장은 대전시지부장 때부터 X씨와 절친했다”고 흘렸다.

또 C씨는 “검찰 수사 결과 Z씨의 수뢰 혐의가 드러났으니 은밀히 확인해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모두 동교동계 사람들의 제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과거 상도동계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큰소리쳤던 동교동계 인사들의 이런 모습은 심하게 말해 난파선에서 먼저 뛰어내리려는 승객들 같다는 느낌마저 안겨준다.

문제는 이런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라며 책임지고 수습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민주당 하위 당직자들 사이에서 “차라리 5공 때 장세동(張世東)같이 ‘총대를 멜 줄 아는 사람’이 그립다”라는 자탄의 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윤영찬<정치부>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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