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용만/“한 3만달러 썼지”

  • 입력 2001년 11월 22일 18시 41분


지난 여름 학회 일로 미국에 다녀오는 길에 시애틀공항에서 경험한 얘기 하나. 돈 많아 보이는 10여명의 60대 부부가 단체로 여행을 마치고 귀국수속을 밟고 있었다. 그 중 6공 때 장관을 한 사람도 섞여 있었는데 부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일행 중 한 부인이 전 장관 부인에게 이번 여행에 얼마나 썼느냐고 묻자 장관 부인이 “이번에 한 3만달러 썼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공직자 비리 부패 위험수준▼

나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황당하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짧은 여행에 내 연봉과 맞먹는 돈을 사용하다니…. ‘과연 이들이 여행경비를 어떻게 조성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장관 지내고 15년이 넘는 사람이 무슨 돈이 많아서 이런 호화여행을 다닐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 돈 내고 내가 여행 가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장관은 지난번 재산증식 의혹으로 물러난 안정남 건설교통부장관 같은 사람이나 그동안 각종 비리에 연루되었던 사람도 아니어서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여튼 우리나라에서는 장관 한 번 하고 나면 남는 게 많은가 보다.

어떻게 장관 한 번 하면 축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경제는 전형적인 정경유착에 따른 발전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각종 이권개입, 인허가, 인사청탁 등 소위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불리는 경제체제로 인해 우리는 1997년 국제금융위기를 맞았고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개발독재로 일컬어지는 박정희 정권시절에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재원이 충분치 않아 도입된 차관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많은 비리가 있었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들어와서는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해 돈으로 때우기 위한 통치자금(이 무슨 부끄러운 단어인가) 조성으로 온갖 비리가 터졌다. 자칭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던 전두환 정권에서는 대통령 친인척이 연루된 장영자 사건 이래 명성 사건, 수서 사건, 골프장 인가 비리 등이 줄줄이 터졌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식으로 노태우 정권의 6공에서도 율곡사업, 원자력 발전비리 등 크고 작은 비리가 터졌다. 그리고 국민의 많은 기대 속에서 출범했던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도 한보비리, 민방 선정, 고속전철 로비 사건 등 정경유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국민의 정부를 자처하는 현 정부도 각종 스캔들과 게이트로 얼룩져 있다. 현 정부 출범 초기에 발생했던 옷로비 사건 이래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 게이트로 이어지는 벤처 게이트와 최근의 분당 백궁지역 의혹까지. 비록 과거와 같은 유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정경유착의 비리와 부조리가 정형화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의 큰 단점인 기억상실증과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감상적인 포용력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푸는 데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자정 노력이 최우선이다. 지난 10·25 재·보선 당시 한나라당은 그간 세간에 나돌았던 각종 비리를 폭로해 대승을 거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여당인 민주당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당 내외로 시끌벅적한 조기 경선 체제로 들어간 듯하다.

▼게이트공화국 언제 끝날까▼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그리고 말단공무원이든 자신의 역할은 국민에게서 나옴을 알아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임된 각종 인허가권을 마치 하늘이 내린 권한인 양 국민 위에서 군림하려 하거나 축재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공직자가 있는 한 우리나라는 부패공화국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됨에 따라 김영삼 정권 이래 신 정부에 대한 기대가 집권 초기에는 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의 도를 넘어 냉소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국민에게도 ‘나 하나쯤이야’ 하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만연하게 되었고 전체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소위 자조적으로 내뱉는 “그 국민에 그 정부쯤”으로 치부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서로를 맥빠지게 하는 사회적 낭비이며 비효율인가. 하여튼 언제까지 비리로 얼룩진 게이트공화국이 계속될 것인지 막 시작한 새로운 천년을 위해 모두 대오(大悟) 각성해야 할 때이다.

윤 용 만(인천대 교수·경제학·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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