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아픈만큼 성숙해지고

  • 입력 2001년 11월 6일 10시 10분


좋은 한주가 시작되네요! 앞으로 여러분께 이런저런 메이저리그와 관련한 칼럼을 올려드릴 notout입니다. 평범한 관객임을 자부하는 저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후추 관계자님들과 다른 칼럼리스트들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첫 칼럼부터 월드시리즈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네요. 애리조나의 끈기가 7차전 대접전을 끝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김병현의 홈런수모가 가리워진 것을 반가워하게 되는 저를 보았습니다.

김병현의 몰락을 지켜보며 몇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점심을 먹는 중에 이런 걸 보면 정말 소화가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두번째로 양키스의 무섭고도 진절머리나는 저력의 승운을 느꼈습니다. 4분의 1의 우승을 독식한 양키스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지면서도, 월드시리즈 내내 1할타에 허덕이던 선수들이 유독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에 그토록 놀라운 집중력(홈런 맞은 공은 무브먼트 없는 밋밋한 직구였는데 그 한 개의 실투를 결코 놓치지 않았죠)은 단순히 팀 캐미스트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작이 가해진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합니다. 정말 루스의 영혼이 적들을 저주받게 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선배들의 영혼이 지터의 짧은 타구를 홈런으로 끌어당겨 준 것일까요?

세번째로 느낀 것은 박찬호가 1천 3백만불만 받더라도 양키스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해 안달복달하진 않을 테니까요. 지터가 10년은 팀을 이끌테고, 버니도 한창때며, 지암비를 잡고, 또는 팀이 해체되는 게레로라도 잡는다면 향후 21세기 초반 그들을 막을 팀은 행여라도 없을테니까요. 아, 물론 노쇠한 투수진은 또 다른 트레이드와 FA로 메울테죠. 그들이 손짓하는 한 넘어오지 않을 선수란 거의 없을테니까요.

마지막으로 김병현이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팬으로서의 고민이었습니다. 그의 경기를 현장에서 보지도 못했고 시즌 내내 몇 게임 등판 경기를 보지 못했기에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단편적인 언론과 여러 정황, 자신의 인터뷰를 통해서 저는 그가 아직 야구를 기초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도달했습니다.

“마운드에서 구질은 내가 정한다. 의사소통이 안될 때도 있지만 포수의 사인과 관계없이 내가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진다.” ? 김병현

“그가 스리쿼터로 던지겠다고 하길래 극구 말렸다. 그러나 결코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포기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았다.” ? 데미안 밀러 (D백스 포수)

“타자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나서면 머리만 더 복잡해진다.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이 더 좋다.” ? 김병현

“나는 경기가 끝난 후 모든 투구의 기록을 컴퓨터로 저장해둔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는 CD로 90장이 넘는다.” ? 커트 쉴링 (D백스 투수)

“여러분은 계획을 세우고 생각을 많이 하는 선수가 되길 바란다.” ? 박찬호 (공주에서 열린 초등학교 야구대회에서)

김병현을 처음 본 것은 광주일고 시절 전국무대를 평정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언더핸더가 많은 한국야구의 상황 때문인지 그는 전혀 튀지 않았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할 때에도 박찬호에 가려 그다지 빛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4차전에 등판한 그의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투구는 ESPN의 반복된 슬로비디오 화면에서 느껴지듯 세계인의 이목을 한눈에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동점 피홈런 행진이 더욱 놀라운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지만요.

그에 대한 여러 정황은 그가 혼자서 야구를 하려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단체경기입니다. 그러나 그 속성을 파고 들면 사실상 1대 1 대결을 강조하는 개인경기인데, 그보다 더욱 깊이 이해해보면 너무도 철저한 단체경기, 아니 그 이상의 심리게임임을 알게 됩니다. 지름 7cm의 공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것은 투수의 몫이지만, 그것은 포수와 다른 야수들의 절대적인 내조 없이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미완의 작품으로 남고 맙니다. 데이빗 웰스(시카고W)처럼 큰 경기에 강하지만 야수들과 호흡하지 못하는 투수를 우리는 결코 대투수로 기억하지 않으며, 동료들도 그의 업적을 칭송하지 않게 되고 스스로 더 나쁜 결과로 가는 것입니다.

아주 흔한 말로 투수는 남편, 포수는 아내로 비유되는데 이 가정의 모습도 두 가지로 나뉘는 것입니다. 만일 언론에서 알려진 김병현처럼 포수(아내)를 ‘공 받아주고 번트 타구, 플라이볼 받아주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남편(투수)이라면 이 가정은 지극히 전근대적인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배울 것도 없고 행복과 감동도 없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자괴감과 불만만 쌓이게 될 것입니다. 투수는 멘탈게임이란 야구에서조차 사실상 경기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는 막중한 포지션입니다. 아주 사소한 사건(예를 들어 주심이 스트라익 판정을 잘못한다든지 하는) 하나로도 그날 경기를 몽땅 망쳐버릴 수 있고, 제 아무리 사이영상 수상자라 해도 1년 중 몇 번은 난타 당하는 것을 또 모든 팬들이 이해해줄 정도로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야구의 핵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투수는 첫째로 자신을 믿고, 둘째로 포수를 믿고, 셋째로 야수를 믿어야 합니다. 쉴링의 말처럼 모든 투수가 자신의 경기를 철저히 분석하지는 못합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굳이 없습니다. 투수에서는 최고의 내조자 포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 많은 포수는 투수를 거듭나게 합니다. 비단 올해의 박찬호와 채드 크루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대투수의 뒤엔 그들을 도와준 포수가 있었고 역사적인 강팀에는 반드시 훌륭한 투수 이전에 더 훌륭한 포수가 있었습니다.

김병현의 말처럼 많은 생각은 오히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미 야구라는 세계에서 최정점에 이른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무계획성은 무모한 배짱으로 밖에 들리지 않게 됩니다. 생각이 많고 치밀한 쉴링이 꼭 필승카드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대투수들은 포수, 야수와 함께할 줄 알고 야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김병현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포기하길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밀러와 바라하스를 더욱 믿고 그들의 조언과 사인에 마음을 열고 서로의 신뢰를 키워주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이제 김병현이 앞으로 어떤 선수로 성장할지 모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월드시리즈에 나설 때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옛 악몽의 비디오가 방송을 타고 전파될 것이란 점입니다. 이것은 박찬호의 對본즈 홈런 신기록 악몽보다도 월등히 무거운 필생의 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며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드라마의 서막을 비극적 서장으로 문 열었습니다. 다음 막이 어떤 내용일지 우리는 두근거림을 안고 기다립니다.

“지금까지는 야구를 혼자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져도 함께, 이겨도 함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김병현

작은 거인 파이팅. (*)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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