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용호/정치판 ‘5대 불가사의’

  • 입력 2001년 10월 18일 18시 48분


한국의 국회는 ‘블랙홀’이라는 비판은 아직도 유효하다. 훌륭한 평가를 받던 인사들도 국회나 정당에 몸담으면 기성 정치인과 다를 바 없이 ‘형편없는’ 행동을 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영수회담 사당화 촉진▼

작년 총선 당시 소위 ‘젊은 피 수혈론’과 함께 기라성 같은 젊은 일꾼들이 국회에 진출했으나 이들도 어느새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다. 이런 현상은 정치판의 잘못된 관행이 고쳐지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말해 잘못된 정치제도나 관행이 고쳐지지 않는 한 새로운 인물이 국회에 진출하더라도 한국의 정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민주화를 추진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 정치판의 ‘5대 불가사의’가 있다. 여야영수회담, 대변인 제도, 장외투쟁, 당정협의회, 하향식 공천제도가 그것이다. 권위주의시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정치관행이 사당화(私黨化)를 부추기고, 국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며, 정당의 비민주적 운영을 지속시킨다.

지난주 오랜만에 여야 영수회담이 열려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영수회담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합의된 사항은 흔히 국회에서 입법화되거나 결의안으로 만들어진다. 영수들이 나서서 정치적 쟁점을 직접 해결하면 국회나 국회의원은 필요 없는 셈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270여명의 국회의원 대신 3, 4명의 정당 영수만 있으면 된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사당화를 촉진하는 영수회담이 없어져야 명실상부한 대중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다.

정당 대변인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도 우리의 정당들은 민생이나 국정에 관한 생산적인 의정 활동보다는 대변인을 앞세워 상대방을 비난하며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대변인이 한일관계, 대북 문제, 토지용도 변경 의혹, 벤처기업의 비리 등 거의 모든 현안을 언급한다. 심지어 상대방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한다. 말 잘하는 대변인이 나서기 때문에 다른 국회의원들이 자기 소관 상임위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1980년대에 어느 정당의 대변인을 지낸 분이 한국의 정치에서 가장 먼저 고쳐야 할 점으로 대변인 제도 폐지를 꼽았는데 당연한 지적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어느 정도 불가피했던 장외투쟁이나 국회 보이콧은 아직도 여전해 정치적 파행이 계속되고 있다. 과거에는 정통성이 결여된 집권세력이 반대세력이나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기 때문에 야당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잘못을 고칠 수 없어 장외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전된 현 시점에서 야당이 장외투쟁을 전개하거나 여야가 국회를 보이콧하는 것은 국민이 위임한 통치권을 유린하는 행위이고, 국회가 가진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5·16 세력이 도입한 여당의 당정협의회도 아직까지 남아 국회가 제 기능을 하는 것을 막고 있다. 예를 들어 당정협의회에서 합의된 법안이 국회에 회부되면 여당 의원은 거수기 노릇밖에 할 수 없다. 일본과 같은 내각제 국가는 당정협의가 필요하지만 한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당정협의가 국회를 행정부의 시녀로 만들기 때문에 고쳐야 할 관행이다.

▼대변인제-당정협의도 폐지를▼

고쳐야 할 또 하나의 나쁜 정치관행은 하향식 공천제도이다. 1954년 자유당이 처음으로 정당공천제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이래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 때마다 공천파동을 겪어왔다. 공천이 정당 구성원의 의사를 결집하는 공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밀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당 총재가 자의적으로 공천권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당을 사당화하고 있다. 이런 사당은 당 총재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면 사라진다. 최근에만 해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이 물러난 뒤 이들이 만든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이 없어졌다.

이러한 ‘5대 불가사의’가 고쳐지지 않는 한 한국의 국회와 정당은 ‘블랙홀’이라는 야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블랙홀’ 정치판은 훌륭한 인물을 바보로 만든다. 자신들의 잘못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한 잘못된 정치관행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김용호(한림대 교수·정치학·본보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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