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어느 실향민의 죽음

  • 입력 2001년 10월 6일 19시 10분


4040번. 대한적십자사에 남아 있는 실향민 정인국 할아버지의 방북신청 접수번호다. 하지만 접수 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함께 신청서를 낸 실향민이 27만3000여명이나 되는 데다 어쩌다 한번씩 생색내듯 열리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가할 기회는 추첨으로 주어졌으니까.

정 할아버지는 엊그제 경기 파주시 임진각 자유의 다리 밑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젠 쓸모없게 된 이산가족방문단 신청서 한 장이 품 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10여년 전부터 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 및 생사확인 신청서를 빠짐없이 냈다는 82세 정 할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세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한때의 불필요한 내전으로 자국민을 희생시킨 나라는 있었어도 반세기가 넘도록 피붙이 혈육간에 생이별을 강요하는 곳은 지구상에 이 땅 말고는 없다. 정 할아버지는 적십자사에 신청서를 접수한 80세 이상 고령자 2만5000여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1세대 실향민들이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다.

정부가 추산하는 전체 이산가족의 규모는 약 760만명, 그 중 북에서 출생해 남에서 살고 있는 1세대는 123만명, 60세 이상 고령자는 69만명에 달한다(2000년 말 현재). 여기에 비하면 작년 6·15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을 통해 가족을 상봉한 남과 북의 3600여명은 그야말로 ‘한줌’에 불과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1세대 실향민의 수가 고령화 등으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 6월 말 열린 1차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원칙적으로’ 합의한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문제는 언제 실현될지 기약조차 없다. 북측은 처음에는 면회소 설치 장소를 놓고 남측과 실랑이를 벌이더니 4월에는 4차 적십자회담마저 무산시켰다. 북측은 언제까지 실향민들의 염원을 외면만 하고 있을 것인가.

이젠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북측은 상설면회소 설치 등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한 남측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이산가족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도적 문제이며 북측이 생각하듯 정치적 사안이 아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외면하는 동안 정 할아버지와 같은 한(恨)이 얼마나 더 쌓이게 될지를 북측은 알아야 한다.

우리 정부도 좀 더 강력하게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북측에 촉구해야 한다. 2차 남북 정상회담도, 그 어떤 남북 화해협력 조치도 이 문제보다 시급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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