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부대찌개’

  • 입력 2001년 10월 4일 18시 28분


6·25전쟁을 겪은 세대라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찌꺼기를 한데 넣어 끓인 ‘꿀꿀이죽’을 기억할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겠지만 그 힘들고 궁핍했던 시절 시장통이나 역전 부근에는 꿀꿀이죽 한 깡통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음식에서 간혹 담배꽁초며 쓰레기가 나와 조심스럽게 살펴가면서 먹어야 했다는 그 추억의 꿀꿀이죽은 아마도 한국 현대음식사(史) 최초의 ‘퓨전(fusion)음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꿀꿀이죽 다음으로 나온 대표적인 퓨전음식이 ‘부대찌개’였다. 부대찌개 역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소시지와 햄, 베이컨 등 육가공식품을 주재료로 해서 김치와 고춧가루 등으로 얼큰하게 끓인 것인데 한때 ‘존슨탕’이니 ‘카터탕’이니 하는 희한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꿀꿀이죽이나 부대찌개가 서양재료를 우리식으로 만든 것이니 퓨전음식임에는 분명하지만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에 나온 ‘필요의 산물’이었으니만큼 요즘의 퓨전음식과는 차원이 다른 셈이다.

▷하지만 부대찌개는 이제 널리 사랑받는 ‘한국음식’이 됐다. 전국 도처에 ‘원조’ 부대찌개 식당이 즐비하고 요리법을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부대찌개는 접속건수가 가장 많은 몇 가지 음식 중에 포함된다고 한다. 심지어 얼마 전 신문에 소개된 한 외국인 CEO는 ‘가장 즐기는 한국음식’으로 서슴지 않고 부대찌개를 꼽았을 정도다. 우리가 외국 문화를 부대찌개만큼만 한국화시킬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밀려 들어와도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음식 맛의 비결은 재료에 있다는 게 통설이다. 그래서인가. 우리 육가공제품의 질도 이젠 선진국에 못지않건만 잘나가는 몇몇 부대찌개 식당들에선 요즘도 꼭 미군부대에서 나온 재료를 고집한다고 한다. 엊그제 미군이 먹다 남긴 쇠고기 소시지 등으로 부대찌개를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됐다. 그 중 한 중간도매상은 20여년 전부터 미군부대 음식물 찌꺼기를 경기도 일대 식당에 공급해 왔다니 경악스럽다. 그들은 혹시 전쟁 직후 꿀꿀이죽을 먹어야 했던 시절과 지금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송문홍논설위원>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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