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명성황후의 최후

  • 입력 2001년 9월 26일 18시 22분


조선조 말 고종이 왕비 민씨와 가례를 올린 것은 1866년이었다. 민씨는 고종보다 한 살 위인 16세였는데 쟁쟁한 명문 세도가에서 왕비를 간택하던 관례와는 달리 일찍 부모를 여읜 영락한 집안 출신이었다. 여기엔 시아버지 대원군의 철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아들 고종이 즉위하기 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한때 파락호 노릇까지 했던 그는 외척의 득세가 두려웠다. 그랬기에 몰락한 가문 출신이자 부인과 종자매 사이인 민씨야말로 자신의 권좌를 지키는 데 후환이 없을 며느릿감이었던 것이다. 이 민씨가 후일 ‘풍운의 여인’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는 명성황후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기대와는 달리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한 반대세력을 앞세워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움켜쥘 정도로 ‘철의 여인’이었다. 이어 그는 청(淸)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줄다리기 속에 온몸을 내던진다. 그 불꽃같은 생애는 1895년 10월8일 막을 내렸다. 러시아와의 제휴에 불안을 느낀 일본이 낭인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그것이다.

▷명성황후는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또 뮤지컬로도 제작돼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호평 속에 공연되기도 했다. 명성황후가 이처럼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하나가 여인의 몸으로 격동기를 관통한 파란만장한 삶이라면 다른 하나는 비극적인 죽음이다. 시해 당한 뒤 시신마저 불에 던져져 손가락뼈 마디만 겨우 수습했다는 기록처럼 명성황후는 삶과 죽음이 모두 극적인 요소로 점철되어 있다.

▷명성황후 시해보고서가 러시아 외무부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마지막 순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문건은 당시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였던 웨베르가 사건 이틀 뒤 본국에 전신으로 보고한 것이다. ‘…황후가 도망가자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난자했다. 몇 분 후 시신을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해한 무리의 이름도 처음 밝혀졌다고 하니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무도한 칼날에 스러져간 황후의 마지막 절규가 다시 들리는 듯하다.

<최화경논설위원>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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