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동네]외롭고 쓸쓸한, 그러나 털털한

  • 입력 2001년 9월 24일 17시 22분


「첫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낸 소설가 윤성희를 만나다」

윤성희씨(28)를 만났다. 첫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민음사)에서 냈다는 빌미로. 인터뷰는 편했으면 했다. 젊으니까. 호젓한 사내 라운지를 찾았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건넸다. 윤씨는 자판기옆 정수기에서 찬물을 섞었다. "미지근한게 좋아서요." 멀끔하게 웃는다. 얼굴 가득 생기가 넘쳤다. 함께 테이블로 걸어갔다. 청바지에 운동화. 가방을 멘 걸음걸이가 씩씩하다다. 맑은 가을하늘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간간히 터지는 환한 웃음,이 예뻤다. 포즈가 어색하다고 핀잔 주는 사진기자의 의견도 그러했다.

-한 반년 만인가? 얼굴 좋아졌네요.

=살 쪘죠? 이게 볼살이 아니라 다 술살이예요. 책도 나오기 전인데 학교 친구랑 출판기념회 한다고… 요즘 계속 술을 마셨더니 금새 얼굴 살이 오르네요(웃음).

-첫 책 축하해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200만 독자가 '레고로 만든 집'을 봤을 텐데… 소설가로서 출발이 화끈했죠?

=등단하고 2년반동안 많이 썼어요. 정신 없을 만큼. 첫 소설집 묶는다고 다시 보니 여러 생각이 들데요.

-돌아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책 교정 본다고 한꺼번에 읽어보니까 남들이 지루하게 볼 것도 같던데. 제 술 친구들이 주정 반 시샘 반 "늬 소설 재미없어" 그러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부분은 내가 쓴 것 같지 않게 잘써서 기특한 생각도 들기도 해요.

-먼저 재미없다는 이야기부터 할까요? 뭐가 재미 없던가요?

=글세, 일반 독자의 시각에서는 그럴 것 같아요. 요즘 단편소설이 잘 읽히지도 않지만요. 그런데 저는 글을 쓸 때 항상 건너편에 독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지금 보니 데뷔작인 '레고로 만든 집'은 잘 짜여져 있지만 어딘가 진부한 느낌도 들고. 그간에 쓴 작품을 한꺼번에 보니까 주인공이 다 엇비슷하지 않은가 생각도 들고…. 독자들이 제 작품집을 보면서 다양한 놀이기구를 타보는 기분은 못 느끼실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이번 작품집이 모노톤으로 보여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 안어울릴 것 같은 2편은 일부러 싣지 않았어요.

-윤성희씨는 대게 낮고 비루한 사람들을 소설로 불러들이죠?

=네. 그건 다양한 인물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것이거나, 혹은 제가 그런 사람에 대한 탐구가 덜 끝났다는 것이겠죠.

-만약 후자라면 윤성희씨가 바라는 작가적 정체성과 관련된 것인가요?

=아직은 신인인데 작품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제 글쓰기 스타일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레고로 만든 집'도 그랬지만 저는 한 작품을 쓰거나 혹은 다 쓰고 읽으면서 다음 소설감이 떠올라요. 어떻게 보면 어떤 유형의 인물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랄까, 아직도 그런 이야기가 다 안 끝난 것 같아요. 주인공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그것 때문에 비슷한 다른 주인공이 탄생하는 것이 아닌지…

-그럼 윤 작가 작품의 주인공은 한 명인가요?

=여러 인물이 결국 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인물의 여러 가지 모습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All for One 아니면 One for All'이란 말인데, 그럼 그 One은 무엇일까요. 작가가 만든 여러 인물들이 갖는 본질이랄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웃음)

-방민호씨가 쓴 발문 제목이 '그늘에서 자라는 작은 꽃 같은 주인공'이네요. 방씨도 주목했듯이 보잘 것 없는 인생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윤씨를 '신세대 작가'로 부르기 어색하게 만들어요. 비유하자면 '소설파 근본주의자'라고 할까?(웃음)

=사실 제가 등단하면서 소외된 사람을 집중적으로 다루자고 작심한 것은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어릴 적부터 자기 집이 없이 떠도는 사람들에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전 수원에서 다세대주택이 많은 파장동에서 살거든요. 그래서 이사왔다가 금방 떠나가는 사람도 많았고, 이사간 빈집에 들어가보기도 하고…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 참 궁금했어요.

아까 '본질'에 대해 물어보셨잖아요. 비슷한 주인공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냐구요. 그건 아마 '쓸쓸함'이 아닌가 싶어요. 집 없는 사람들이 가진 태생적인 쓸쓸함. 제가 98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에서도 '언제나 외발일 수 밖에 없는 길 위의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어요. 생래적으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나 봐요.

(참고로 99년 신춘문예 당선자로서 윤씨의 소감은 이러했다. “가만히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참 외로워 보인다. 한쪽 발이 땅에 닿는 동안 다른 한쪽 발은 허공에 떠있어야 하는 ‘걷다’라는 행동은 나를, 사람들을 외롭게 만든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우리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서 있어도, 얼굴에는 혼자라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언제나 외발일 수밖에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을 내 마음 속으로 끌어오고 싶다. 앞으로 내가 쓴 소설은 ‘걷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혹시 작가 본인도 그렇게 쓸쓸한 것은 아니예요?

=(웃음) 꼭 그런건 아니예요. 외로움을 즐긴다고 할까?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생기면 그걸 오래 품고 있는 것이 좋아요.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생각이 들면 친구를 만나서 풀어버리기보다는 내 안에 가두어 놓는 것이죠. 그렇다고 혼자 방안에 틀어 박혀사는 자폐아는 아니고... (자기 볼을 가리키며) 술살 보이시죠? (웃음) 사실 제 성격이 미지근한 면이 있기도 하고…

-커피에 냉수 섞어 마시는 것처럼요?

=네(웃음). 그렇다고 제 작품이 "삶이란 허무하다"는 식으로 냉소적이지는 않아요. 저는 제 소설의 주인공이 낮에 고된 삶을 살아서 밤에는 단잠을 잘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하니 연민이 생기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오래 했으니 지금은 '맘에 든다'는 이야기를 해보죠. 소설에서 어떤 대목이 맘에 들었어요?

=그러니까, 전부는 아니고 인물의 심리나 정황을 묘사하는데 괜찮은 대목이 있는 것 같아요. <이 방에 살던 여자는 누구였을까>에서 형광등 줄에 매달아놓은 인형의 그림자가 사람이 목을 멘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것으로 묘사한 대목이 있어요. 주인공의 절망적인 심정을 인형 그림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린 것인데... 이런 식으로 저는 직접적인 심리 서술보다는 간접적인 묘사를 선호해요.

-'소설파 근본주의자'다운 면모네요.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죠, 모.(웃음) 그런 걸 보면 소설을 쓰면서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작가의 성격이 드러나나 봐요. 저 역시 그렇거든요. 친구가 나쁜 짓 해서 미워도 대놓고 "나 화났어"라고 말을 못해요. "그게 저...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단편소설의 원리주의랄까 근본주의가 있다면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은 못해봤고, 저는 적어도 단편소설은 짜여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는 요즘 같은 초스피드 시대에 꼼꼼한 묘사가 읽히냐고 하지만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편은 빨리 쉽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활자를 들여야 봐야 한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소설 쓰면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수월하게 써진다는 느낌이 들 때예요.

-'정통파'를 지향하면서도 여러 스타일을 시도하는 듯한데…. 그리고 윤 작가 작품이 모두 더디게 읽히는 것도 아닌 듯하고…

=아마 <모자>가 그럴 거예요. 친구였다가 돈 문제로 소식이 끊긴 두 남자의 시점을 교차하면서 쓴 작품이예요. 여기서 주인공의 심리를 빗대서 묘사한 것이 도입부에 등장하는 '운세달력자판기'예요. 이것을 통해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친구가 실은 한 동네 살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 소재인데…. 이걸 알아차리는 독자가 별로 없더라구요(웃음). 이런 묘사 뿐만 아니라 화자의 입장을 바꿔가며 써서 읽는 속도감이 있으리라고 봐요. 데뷔작 <레고로 만든 집>이 정통파 스타일이라면 크진 않지만 저도 꽤 변화한 셈이죠.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다른 작품이 있나요?

=가장 최근에 쓴 <계단>도 그런 것 같아요. 시점 교차서술은 <모자>와 비슷하지만 인물이 좀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각자가 외로워서 혈육을 찾는 듯 서로를 연인처럼 그리워하던 여자 주인공이 많았는데, 여기서는 아내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두 남자가 호형호제하는 단계까지 갔으니까. 이전의 작품이 서로 떨어져서 시점 교환을 통해 한 지면에 등장했다면 여기서는 서로 부딪치는 것이거든요. 앞으로 제 소설은 이런 인간의 부딪침에 대해 더 고민하지 않을까 싶어요.

-단편집을 냈으니 장편소설도 곧 쓰셔야죠? 여러 출판사에서 달려들고 있을 텐데. 구체적인 계획 있어요?

=아직은 아무 것도. 장편소설 쓰는 것은 단편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일년에 3-4편 쓰는 단편은 하나가 삐끗해도 다음에 좋은 작품으로 만회하면 되는데, 장편을 그럴 수 없잖아요. 등단하면서 제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고….

-도대체 무슨 작심을 하셨길래.

=음….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요. 첫 번째는 작품 쓰기 전에 미리 출판사와 계약하지 말자는 것, 두 번째는 소설 외에 잡문은 가급적 쓰지 말자는 것, 마지막은 흔히 말하듯이 초발심을 잃지 말자는 것...

-요즘은 무슨 작품 봤어요?

=몇 일전에 미루고 미루다가 김연수 선배의 <굳빠이, 이상>을 봤어요. 참 재미있더라구요. 취재해서 써야 되는 것이라 품도 많이 들었을 것 같고.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지는 않겠지만 다른 작가가 쓰기 힘든 독특한 작품이라고 생각되던데요.

-선배들 작품은 어떤 걸 즐겨 읽었어요?

=오정희 선배 것이야 당연히 좋아하고, 최인훈 선생님 단편도 좋구…. 왜 <한국문학단편전집> 있잖아요, 50권짜리 전집, 그런 책 보고 커서 그런지 옛 분들 작품이 더 좋아요.

-지난 토요일자 <조선일보>에 난 윤성희씨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하성란 작가와 닮을까 겁낸다고 했던데…

=저는 그런 말 안했는데, <문학동네> 가을호에 황종연 교수께서 제 평을 쓰면서 '윤성희는 하석란의 어떤 측면을 닮아있다'고는 하셨는데…

-취미는 없어요? 술 마시는 거 말구(웃음).

=야구 좋아해요. 야구장 가는 것도 좋아하고 텔레비전 중계 보는 것도 좋아하고. 동네 친구들이랑 야구장 가면 팩소주 홀짝이면서…(웃음). MBC청룡 때부터 팬클럽이었던 LG트윈스를 제일 좋아해요. 제 소설에도 나오지만 놀이동산 가는 것도 좋아하구.

참, 전 인물 못지 않게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야구장이나 놀이동산 같은 공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도 써보고 싶어요. 판타지 소설이 주는 매력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의 잘 만들어진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아요. 지금도 단편소설 쓸 때는 주인공이 사는 집의 평면도나 동네 모습을 수첩에 그려놓고 작품을 써요.

그녀와의 인터뷰는 당초 바램처럼 편했다. 털털해서. 외로워서 술 생각날 때, 아무때나 전화해서 술잔을 나눌 수 있는 벗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제 몫의 쓸쓸함을 자기 안에 가두고 밤잠을 설칠 때가 있으리라. 만나고 나니 앞으로 그녀의 작품이 더둑 궁금해졌다. 지금과는 아주 다른 작품이었으면… 쓸데없는 걱정과 은근한 기대가 교차했다. 저 홀로 씩씩하니 잘 해내리라.

<윤정훈 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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