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 계절에 듣는 음악]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 입력 2001년 9월 4일 18시 37분


가을. 지상의 모든 생령들이 저마다의 만족을 누린다. 나무들은 지리했던 여름의 뜨거운 인내를 바알간 결실로 익혀내고, 짐승들은 소리 없이 살쪄간다.

그런데 이유가 무엇일까. 이 풍요한 계절에 오직 인간만이 남모르는 저마다의 회한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신이 성취해온 것을 못미더워 하고, 혹 ‘가지 않은 길’은 없었던지, 기억을 더듬어 보고, 예전의 달콤했던 순간들을 향해 한없이 기억의 끈을 잡고 떠내려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가 교향곡 2번을 작곡한 것은 1906년에서 1908년까지. 30대 중반의 젊은 대가로서 안정을 누리고 있을 때다. 비평가들의 송곳 같던 펜 끝은 작곡가가 쌓아온 권위 앞에 웬만큼 무뎌졌고, 그의 단단한 위상은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 결혼생활은 행복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초가을의 햇살과 같은 아늑한 안온함이 있고, 뿐만 아니라 그리운 시절에 대한 회억(回憶), 알 듯 말 듯 내비치는 슬픔과 후회도 나지막이 읽혀진다.

누구나 한 번만 듣고 ‘사랑에 빠질’ 만한 악장은 3악장 아다지오다.

서두부터 현악기로 꿈에 젖어들 듯 솟아오르는 첫 주제, 뒤이어 클라리넷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주제. 모두 아득히 지나간 먼 시절 하나쯤 있었을 법한 가을날의 사랑, 자신의 옆을 은은한 머리칼 내음 풍기며 걷던 그 누구인가의 눈길을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팝 가수는 이 악장의 선율들에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작품을 ‘가을 교향곡’으로 서슴없이 추천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3악장뿐만이 아니다. 1악장. 현악은 끝을 알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부유한다. 초가을의 말간 햇살이 비치는 오후, 잘 들어맞지 않는 덧문이 덜컹거리고, 키 큰 미류나무의 잎은 어찌 저토록 반짝이며 팔랑거리는지! 이 모든 것은 마음 속에 그려지는 이미지일 뿐이지만, 낭만주의의 최후를 장식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솜씨 좋은 팔레트는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그림을 화폭에 그려놓도록 만든다.

4악장도 마찬가지. 활기 넘치는 리듬감의 첫 주제에 이어 이윽고 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초가을의 하늘을 현악의 유려한, 새로운 주제 속에 풀어놓는다.

이 멋진 교향곡을 아쉬케나지 지휘의 콘서트헤보 관현악단은 색상이 선명한 정밀사진처럼 큰 화폭에 펼쳐놓는다. 현의 울림은 생생하고, 전체 합주의 밸런스도 얼마나 풍요로운가. 3악장에서 두 번째 주제를 제시하는 클라리넷도 뚜렷한 노래로 마음속에 진한 금을 긋는다. 한 장 값으로 1번 3번 교향곡과 함께 두 장의 CD를 살 수도 있으니, 주머니 사정을 감안할 때도 최고의 선택으로 꼽을 만하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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