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엎드려 있으라구요?

  • 입력 2001년 7월 9일 18시 46분


미국에 이민간 지 24년이 되는 매형이 며칠전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다.

“동아 조선 중앙을 세게 손볼 거라고 여기 뉴저지에서도 시끌시끌한데 별일 없어? 김대중 대통령이야 과거 동아일보 신세 많이 지지 않았나. 그런데 그 사이 뭘 그렇게 밉보였나 그래.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소식이 뜸하던 매형이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온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궁금하고 걱정도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세 정의’란 명분과 ‘언론 길들이기’란 정치적 의도가 맞물린 이 고약한 조합의 속내를 어찌 단숨에 버선목 뒤집듯 할 수 있으랴.

하여 “글쎄, 좀더 두고 봐야겠지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는데 매형은 “그나저나 처남은 이번에는 가만히 엎드려 있으라구. 80년에 한번 겪었으면 됐지 또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속 편히 잠을 청하기란 틀린 노릇이었다.

엎드려 있으라구요?

까놓고 얘기해서 이번 언론사태의 본질은 바로 이 한마디에 함축돼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정부측은 누가 엎드리라고 했느냐고 말한다. 세무조사는 언론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위한 것이지 언론자유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속보이는 소리다.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는 동아 조선 중앙이 여론을 독점하고 오도(誤導)하고 있다.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개혁이고 정권재창출이고 다 물건너 갈 것이다. 그러니 세무조사로 그 기부터 꺾어놓아야 한다’, 정색하고 말하기야 어렵겠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던가.

하기야 말하지 않아도 다수 국민은 이미 알 만큼 안다. 탈세를 했다니 그거야 안되지 하는데다 여기 저기서 제각각 목청들을 높이니 ‘언론탄압’이 먼저인가, ‘조세정의’가 먼저인가 헷갈릴 뿐이다.

탈세를 했으면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세금 내라는데 무슨 잔소리냐는 식의 단선논리는 곤란하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빅 3’의 비판을 여론 오도로 규정짓는 권력측의 위험한 일방적 인식이다. 물론 ‘빅 3’의 비판이 모두 옳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또 같은 비판도 누구에게는 옳게, 누구에게는 옳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독자의 판단이다. 도대체 수백만 독자가 여론을 조작하고 오도하는 신문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인가. 이는 한마디로 독자인 국민을 우습게 보는 소리다.

언론개혁을 하자면 그 목표와 주체가 명확하고 그 방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목표는 무엇인가. 이른바 권언유착(權言癒着)의 고리를 끊어 언론이 공론(公論)의 마당으로서 제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언론개혁의 우선적 목표라는 데는 이의(異議)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에 비판적인 몇몇 신문을 타깃으로 한 듯한 작금의 언론개혁은 거꾸로 권언유착을 하자는 게 아닌지 의문이다.

언론개혁의 주체가 정부일 수는 없다. 정부가 나서면 언론장악일 뿐이다. 일부 시민단체가 주체일 수도 없고, 그 방법으로 세무조사부터 시작하는 것은 난센스다. 하물며 방송이 특정신문을 공격하고 신문은 신문대로 편을 가르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이성적 논의는 간 데 없고 욕설만 쏟아내는 소모적인 여야(與野)의 정쟁(政爭)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정권재창출을 염두에 둔 듯한 여권의 언론개혁 문건이나 ‘신문이 비판을 계속해야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이긴다’는 식의 정파적 발상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결코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언론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언론자유의 대전제하에 언론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의 문화와 관행까지를 신중하게 고려하는 자율 개혁이어야 한다. 정치적 의도가 끼어드는 언론개혁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일방의 잣대로 매도를 일삼으며 편가르기식 적대와 증오를 부풀려 자칫 사회공동체를 두 동강이라도 낼 듯한 요즘 세태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언론개혁 한다고 하다가 나라 먼저 결딴날 판이다.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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