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압축 화해'

  • 입력 2001년 7월 3일 18시 26분


현대 한국사회를 규정짓는 가장 큰 특징 한 가지를 꼽으라면 아마도 ‘압축성장’이 될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100년 이상 걸려 이룩한 산업화 근대화를 불과 한 세대 만에 일궈낸 초고속 경제성장, 그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사회를 해석하는 키워드라는 것이다. 물론 그 압축성장의 과정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한국인은 조급하다, 무슨 일에든 ‘빨리빨리’를 외친다 등의 얘기가 그래서 나왔다. 아무튼 그런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우리는 빠른 변화를 당연시하게 됐다.

▷DJ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남북관계에도 큰 변화가 몰려왔다. 작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상징적인 예다. DJ 정부가 표방한 대북(對北) 화해협력정책의 핵심은, 한반도 주변 세력이 과거처럼 한반도 문제를 자기들 입맛대로 주무르지 못할 수준으로 남북이 관계를 급진전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이 말을 학술적으로 표현하면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化)’이고, 경제적 ‘압축성장’에 비교한다면 남북관계의 ‘압축화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언론사 세무조사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냐, 아니냐를 놓고 정치권이 시끄럽다. 김 위원장 답방 전에 정부가 비판적인 언론을 손보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인데, 야당에선 ‘그렇다’고 하고 여당에선 ‘지나친 비약’이라며 펄쩍 뛴다. 그런데 이런 논란의 밑바닥에도 ‘압축화해’에 대한 인식차가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정부 여당은 김 위원장 답방만 성사되면 남북관계가 지금보다 한 차원 높게 진전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압축화해’의 신봉자들인 셈이다.

▷그러나 물질적 차원의 압축성장은 성공했다지만 정신적 차원의 압축화해는 과연 가능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반세기 동안 적대시해온 남북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구원(舊怨)을 던져버리고 덥석 껴안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언론사 세무조사와 답방 문제를 연계시킨 야당은 집권층의 ‘압축화해’ 의지에 의문을 던진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북문제에서 여야의 초당적(超黨的) 협력은 점점 물건너가고 있는 것 같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송문홍논설위원>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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