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김정일 답방' 보다 중요한 것

  • 입력 2001년 6월 18일 18시 26분


비가 와 가뭄 걱정은 한시름 놓았다지만 당장 미뤄놓았던 국정쇄신책을 내놓아야 할텐데 달리 무슨 비책을 숨겨놓은 것은 아니다. 청와대를 물갈이하려 해도 마땅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어느새 한 해의 반이 지나가건만 등돌린 야당을 돌려세울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강한 여당’이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대파업의 기세가 꺾였다고 하지만 노동계 반발이 심상치 않다. 이러할 때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라도 언제쯤 가겠다고 언질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북한 배나 어깃장 놓듯 남쪽 해역을 들락거리니 이래저래 요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심사가 답답할 듯 싶다.

김 대통령은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을 맞아 “김 위원장은 약속대로 올해 안에 서울에 와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한달 남짓에 김 대통령은 여덟 차례나 ‘김정일 서울 답방’을 촉구했다. 그러다 보니 ‘애걸’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다.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으로서는 모양새에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있지 못하다. 임기가 1년 반 이상 남아 있다고 하지만 내년 후반기부터는 본격적인 대선 정국에 들어간다고 볼 때 시간이 별로 없다. 그렇지 않아도 야당쪽에서는 김 대통령이 ‘김정일 답방 카드’를 정권재창출용으로 활용하려들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내년이 되면 그런 의심은 더욱 짙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연내 답방’을 재촉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이 ‘김정일 답방 카드’로 지금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국정 주도권을 잡으려 희망하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야당의 의심처럼 김 대통령이 그 카드로 개헌이나 정계 개편 등 무리수를 써 정권재창출로 끌고 가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국민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김 대통령이 잘 알 것이다.

비록 이제 남북문제를 국내정치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정파나 권력의 이해가 작용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한반도의 평화 공존은 고사하고 남한 사회 내 정파간 다툼과 보수-진보 싸움에 지역 갈등까지 뒤엉키면서 분열과 혼돈으로 치달을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이 농후하지 않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에 올지 안 올지는 점치기 어렵다.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이미 시기를 놓쳤으며 남북간 긴장완화에 대한 의지마저 없어 결국 오지 않을 것이란 시각에 이르기까지 그 전망은 크게 엇갈린다.

북측은 6·15 공동선언 1돌을 기념하는 메시지에서 ‘외세 배격과 자주성’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달 초 예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에게 “미국이 남한에 갖고 있는 영향력 때문에 지금 당장은 (서울 답방이) 어렵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해봐야 미국이 틀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소리다. 그러나 북측이 ‘검증할 수 있는 변화’를 요구하는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강경론을 빌미로 6·15 공동합의마저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그 자체가 ‘외세 우선’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김 위원장이 서울에 오느냐, 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에 내재한 이러한 모순과 이중성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가에 대한 남한 사회 내부의 합의를 구해나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원칙 있는 대북 포용정책’을 장기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매우 어렵고 긴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그렇게 볼 때 야당측이 6·15 공동선언 1년을 맞아 ‘공동(空洞)선언 전락 위기’라고 깎아 내린 것은 여권이 단기적 성과에 급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총론에는 찬성한다면서도 각론마다 ‘대안 없는 조건’을 붙인다면 그건 찬성이 아니다. 야당이 수권정당임을 자임한다면 남북문제가 부메랑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서독의 경우 첫 동서 정상회담 이후 세 차례나 정권교체가 있고 나서야 통일을 이루었다. 남북은 이제 긴 여정의 첫발을 옮겼을 뿐이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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