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썸’…예정된 죽음과 운명의 대결

  • 입력 2004년 10월 20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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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 ‘텔 미 썸딩’의 장윤현 감독이 5년 만에 연출한 영화 ‘썸’. ‘데자뷔(기시감)’라는 정신 현상을 범죄스릴러의 빠른 속도감으로 담아냈다. 남자 주인공 고수(위 사진 왼쪽)와 여자 주인공 송지효(왼쪽 사진).사진제공 래핑보아
‘접속’ ‘텔 미 썸딩’의 장윤현 감독이 5년 만에 연출한 영화 ‘썸’. ‘데자뷔(기시감)’라는 정신 현상을 범죄스릴러의 빠른 속도감으로 담아냈다. 남자 주인공 고수(위 사진 왼쪽)와 여자 주인공 송지효(왼쪽 사진).사진제공 래핑보아
장윤현 감독이 ‘접속’(1997년) ‘텔 미 썸딩’(1999년), 단 두 편의 영화로 스타가 된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어둡고 도시적인 감성이 주는 스타일의 세련됨, 둘째는 초현실적이고 정신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 같은 모호함의 매력, 셋째는 긴장의 끈을 조여 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다. 이런 요소들은 때론 충돌하고 때론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장 감독이 5년 만에 스릴러 ‘썸(Some)’을 내놨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이름을 잊고 본다면 썩 괜찮다. 그러나 ‘장윤현 브랜드’임을 감안한다면 기대에 못 미친다.

경찰 호송 도중 사건증거물인 100억 원대의 마약이 탈취된다. 호송 담당자인 강력계 오 반장이 약물 양성반응을 보이면서 용의자로 지목된다. 후배 강성주 형사(고수)는 진범을 잡겠다며 수사에 착수한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의 주모자인 ‘권정민’이 바로 강성주라는 사진증거를 확보한다. 쫓기는 몸이 된 강성주는 우연히 교통방송 리포터인 서유진(송지효)과 마주친다. 유진은 24시간 후 강성주가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데자뷔(기시감·旣視感)를 통해 보게 된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장 감독은 당초 쉽고 빠르면서도 황량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듯하다. 온 몸에 피어싱을 한 채 인터넷으로 범행모의를 하는 악당들의 사이버 펑크 이미지, 고수의 음울한 패션, 외제 자동차가 풍기는 도시적 감성, 휴대전화를 통한 소통과 기만 등은 스타일 자체가 본질이기도 한 장윤현 영화의 질감을 부각시키는 장치들이다.

장 감독은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넘치게 했고, 어떤 이야기는 모자라게 했으며, 결과적으론 어떤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는 장 감독이 굳게 믿던 ‘비장의 무기’가 오히려 이 영화 자신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 버렸기 때문이다. 그 ‘비장의 무기’는 ‘데자뷔’다.

‘데자뷔’는 이 영화에서 두 가지에 ‘약발’이 먹혔어야 했다. 우선 강성주와 서유진의 사랑을 운명적인 듯 보이게 만들었어야 했고, 또 다른 하나는 강성주가 죽는 시간을 예고함으로써 카운트다운의 긴박감을 조성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어요?”를 단순 반복하는 서유진의 ‘데자뷔 과잉’은 스릴러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템포를 늘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데자뷔’에 에너지를 빼앗긴 ‘썸’은 에피소드를 차곡차곡 쌓거나, 반전을 위한 실마리를 깔거나,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공고히 다져갈 만한 경황 자체가 없게 된다. 막판에 드러나는 진범의 정체가 뜬금없게 느껴지는 건 이런 설명의 부족 때문이다.

‘썸’으로 스크린 데뷔한 고수는 ‘한 가지 표정으로 여러 말을 하는 법’을 과제로 남겼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에 이어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송지효는 햄버거 광고 속 발랄한 이미지를 씻어내지 못했다. 어두움이 더 필요하다.

자동차 추적장면이 특히 그렇지만, ‘썸’의 액션은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많은 분량을 촬영한 뒤 군데군데 ‘뼈아프게’ 들어낸 흔적도 보인다. 하지만 영화연출은 사법고시와 비슷한 걸까. 오래 준비한다고 반드시 최상의 결과가 나오진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2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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