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민웅/품격과 담쌓은 지도자

  • 입력 2001년 6월 14일 18시 27분


요즘 시중에는 90년 만에 최악이라는 가뭄 속에서 물 찾기, 물대기에 밤잠을 설친 농민들의 충혈된 눈길도 외면한 채 골프 행각을 벌인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를 두고 정치 지도자의 품격에 관해 말이 많다.

품격의 첫번째 조건은 역시 수치심을 아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한 사람을 품격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품격의 두번째 조건은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원칙 또는 규범이 있느냐의 여부이다. 품격을 갖춘 사람은 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품격이 없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에는 원칙이 없다.

품격의 세번째 조건은 용기다. 원칙을 지켜나가려면 때로 용기가 필요하다. 옛말에도 “수치심을 알면 용기에 가깝다”고 했다. 비겁하고 비루한 자들은 원칙도 없을 뿐더러 수치심도 없다. 품격의 네번째 조건은 책임감이다. 적반하장 격으로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지 않는다. 품격의 마지막 조건은 성찰이다.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잘못을 고쳐나간다. 품격이 없는 사람은 반성할 줄 모른다.

이런 조건을 기준으로 정치 지도자들의 품격을 한번 살펴보자. JP는 자신의 골프 행각에 대한 비난에 대해 “골프를 못 쳐서 병이 나면 누가 대신 죽어줄 것이냐”고 일축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며칠 전 이런 JP를 두고 ‘철면피’라고 했는데, 이런 정도면 단순히 수치심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분별력을 잃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부모의 묏자리를 명당으로 옮겨 놓고 ‘JP 대망론’을 흘리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가? 외환위기 사태를 몰고 와 숱한 서민을 눈물짓게 했던 자신의 실정(失政)에 대해 참회할 줄 모른다. 참회는커녕 김대중 대통령이 실수만 하면 한건 물었다는 식으로 이치에 닿지 않는 논평을 ‘대변인 격’이라는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을 시켜 발표한다. YS의 행각을 보면 도무지 반성을 모르는 사람 같다. YS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숙이 아닌가 싶다. 박의원도 이제는 처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차라리 의원직을 사퇴하고 YS의 공보비서관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세비를 받는 국민의 대표답게 품격을 지키든지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

국정쇄신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대변한 소장파 의원들의 정당한 요구를 가뭄을 내세워 어물쩍 넘기고 있는 김대통령은 어떤가? 역시 품격의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원칙과 용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무엇이 두려운가? 어려운 때일수록 원칙에 따라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흐른다고, 말로만 적당히 때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은 어떤가? 민주적 절차를 거친 당내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급조한 정당을 발판으로 대선에 나섰으나 패배했다. 민주사회의 지도자로서는 씻을 수 없는 흠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게 보이는 언행으로 젊은층의 지지를 어느 정도 확보했고, 또 그 젊은층을 의식해서 때로 개혁을 내세우면서도 당내 소장파 의원들의 쇄신 요구에 대해서는 엉거주춤 말을 삼가고 있다. 도무지 원칙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품격이 낮을수록 원칙이 잘 통하지 않는다. 원칙이 없으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다분히 DJ의 핍박에 힘입어 강골의 야당 지도자로 성장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어떤가? 스스로의 자생력보다는 아직도 DJ의 실수가 가져다 주는 반사이익에 안주하는 모습이다. ‘원칙 있는 지도자’로서의 면모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리저리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다.

국민이 불쌍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품격의 조건을 두루 갖춘 지도자를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은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의 거짓말, 언행의 불일치, 무책임, 무능력, 수치심 없는 말 때우기로 인해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렇게 보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력의 요체는 분명해진다. 하나는 품격을 확보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국가경영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로만 ‘준비된’ 운운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과 실천 계획을 세워 국민이 신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민웅(한양대 교수·언론학 본사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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