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신석호/“재벌 흉내내다가 …”

  • 입력 2001년 4월 19일 18시 30분


98년부터 ‘벤처 붐’이 일면서 많은 이들은 오로지 기술과 아이디어로 승부한다는 ‘벤처정신’이야말로 우리 경제를 바로 세울 새 힘이라고 기대했다.

이 같은 기대의 배경에는 ‘대마불사(大馬不死)’를 외치며 문어발식 확장을 하면서 회사돈을 제 돈인 양 주무르던 재벌 기업가들의 잘못된 관행이 ‘환란(換亂)’을 불러왔다는 반성도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디지탈라인(KDL) 정현준(鄭炫埈) 사장과 MCI코리아 진승현(陳承鉉) 부회장이 저지른 대형 금융비리 사건은 벤처에 걸었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19일 구속기소된 한국기술투자(KTIC) 서갑수(徐甲洙) 회장의 경우도 이들 두 사건 못지 않게 벤처업계에 대한 실망감을 많은 국민에게 안겨주었다.

서씨는 회사돈으로 역외펀드를 만들어 주식투자를 통해 번 686억여원을 횡령하고 보증을 서준 유령회사가 대출받은 134억원으로 회사의 주가를 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다.

변호인측은 “서씨 개인이 치부한 돈은 한푼도 없으며 686억원도 사장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돈”이라고 항변했다. 또 회사를 유지하고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실정법을 어겼을 뿐 횡령하겠다는 ‘범의(犯意)’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일례로 서씨가 회사에 100억원의 빚을 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으로 번 돈 등을 빚 갚는 데 사용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서씨는 유령회사에 보증을 서준 뒤 대출받은 100억원으로 한국기술투자의 주식을 사는 데 쓰기도 했다.

서씨측의 이런 주장들에 대한 유무죄 여부는 법원이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회사를 위해 실정법을 어겼다”는 항변은 과거 한보와 기아 대우 등 재벌그룹이 일만 터지면 입에 달아온 핑계였다.

과거 재벌들의 잘못된 행태를 답습했다는 점만으로도 서씨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는 재벌들의 폐해로부터 한국경제를 살리겠다며 벤처업계의 ‘대부(代父)’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신석호<사회부>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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