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북녘가족의 겉과 속마음

  • 입력 2001년 3월 1일 18시 27분


69년 대한항공기 납북사건 당시 여승무원 성경희(成敬姬·55)씨. 그는 이번 3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은 인물이었다. 23세 꽃다웠던 얼굴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평양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32년만에 만나러 간 어머니 이후덕(李後德·77)씨에게 어떤 말을 할까.

TV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은 역력했으나 아주 힘든 삶을 살고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첫 대면때 김일성대학 교수라는 사위와 장성한 손자손녀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찬찬히 딸의 얼굴을 살피던 어머니는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일단 안심이 되는 듯 그제야 처음보는 딸 가족의 인사를 받았다.

다음날 개별상봉. 이날의 딸은 옛날의 조용하던 딸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으면 장군님이 내 미래 운명, 그리고 가족들을 책임져 줄 수 있어서 내가 남기로 한 거야. 남에 갔으면 엄마가 내 운명을 책임지지 못했을 거잖아. 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엄마.”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머니는 그냥 “말 안해도 다 안다.”며 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또 상봉 첫날 서울에서 조카들을 만난 북한 피바다가극단 총장 김수조(金壽組·69)씨. 그는 조카들을 만난 기쁨의 표시보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데 열을 올렸다.

‘지도자 동지’의 은덕을 생각하며 자신이 석달전부터 키웠다는 ‘김정일화’ 화분 3개를 조카들에게 나눠주고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했다. 조카들이 어색해 하자 그는 혼자 우렁차게 만세를 불렀다.

본보 2월 28일자 A29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현주소를 시사한다. 서울의 개별상봉에서 정지용(鄭芝溶) 시인의 아들인 남쪽의 구관(求寬·73)씨가 북쪽의 동생 구인(求寅·67)씨에게 ‘독일식 자유로운 상호방문’의 필요성을 얘기하자 북측의 한 ‘기자’가 구관씨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는 장면. 그 사이에서 당황한 구인씨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한편 북한에 살아있다는 납북 대한항공기 기장 유병하씨(69)의 부인 엄영희씨(67)의 차분함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세월과 체제의 어쩔 수 없는 위력을 꿰뚫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와서 남편을 찾아 나선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하고는 13년을 살았지만 북한 생활은 벌써 30년을 넘었잖아요.”

그러나 그런 그도 32년전에 살던 서울 용산의 집을 떠나지 않고 가구주 이름도 아직 ‘유병하’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이제는 몇 달에 한 번씩 요란한 ‘상봉잔치’만 벌일 때는 지난 것 같다. 반세기의 벽이 며칠간의 감성적 만남으로 허물어질 수 없음을 실감한다. 보다 냉철한 이성과 비정치적 발상으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가야 할 때다.

북한측도 상설 면회소 설치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당연히, 또한 조속히 그것이 실현돼야 한다. 더 바란다면 남북의 가족끼리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는 일이다. 그래야 남북의 벽은 점점 낮아질 수 있다.

육정수<사회부장>sooy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