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훈 기자의백스테이지]번안곡 열풍,우리 가요 죽인다

  • 입력 2001년 2월 21일 17시 06분


얼마 전 한 독자로부터 제보가 접수됐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여가수 '왁스'의 '오빠'(사진 위)라는 노래가 외국곡을 표절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을 확인한 결과 '오빠'는 음반 직배사 '소니 뮤직 코리아'에서 신디 로퍼의 'She Bop'(사진 아래)이라는 곡의 저작권을 5천달러에 정식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She Bop'은 지난 83년 발표돼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팝 넘버. 왁스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오빠'는 'She Bop'의 멜로디에 작곡가 신동우가 일부를 첨가해 만들어진 노래였다.

이처럼 요즘 국내 가요계에는 외국곡의 판권을 정식으로 사들여 한국어 가사를 붙이는 번안 가요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 노래를 번안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 노래 비교해서 들어보기

  - 오빠
  - She Bop

이미 김장훈의 '굿바이 데이', '컨츄리 꼬꼬'의 '오 마이 주리아' 등이 인기를 얻었고 올 들어서도 일본 번안곡의 히트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각종 가요순위 차트를 석권한 'SES'의 '감싸 안으며'는 일본의 시마노 사토시가 작곡해 미시아가 공전의 성공을 거둔 노래고, 스페셜 앨범 전곡을 일본 번안곡으로 꾸민 포지션의 타이틀곡 'I Love You' 역시 95년 요절한 뮤지션 오자키 유타카의 곡이다.

일본어로 된 노래의 전면 개방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감안할 때 번안된 일본곡의 열풍은 마치 사전에 한국어로 일본 노래를 홍보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외국곡 번안은 현지에서 빅히트를 기록했던 노래인데다 국내 정서와 잘 어울리는 곡들을 가사만 바꾸는 작업이어서 '안전한 성공이 보장된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매니저 A씨는 "요즘 웬만한 음악 코드는 다 나와있는 상태여서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며 "외국곡을 새롭게 편곡해 국내에 소개하는 것도 새로운 방편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혹자는 은근슬쩍 외국곡을 표절 혹은 도작(盜作)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인세를 주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번안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내 작곡가들이나 음악 관계자들의 시각은 좀 다르다. 작곡가 K씨는 "잘 나가는 소수의 인기 작곡가들이 가요계를 주무르는 상황에서 번안곡들이 쏟아지는 것은 한국 음악 시장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창작에 대한 열정 없이 원곡과 똑같은 번안곡이 인기를 얻는 걸 보면서 작곡일을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익의 일부를 일본 작곡가에게 지불하고 외국곡을 쓰는 것이야 음반 기획사 마음이겠지만 우리 가요가 자생력을 잃는다는 점에서 번안 열풍은 심각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번안곡으로 안전 운행만 하기보다는 신선한 사운드를 선보이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황태훈 <동아닷컴 기자>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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