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엘리트]영국 지휘자 사이먼 래틀

  • 입력 2001년 1월 15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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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자’의 자격은 길어야 3개월을 넘지 않는다. 이 짧은 기간에 엄청난 힘과 뉴스가 집중된다. 영국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46)은 2년3개월 동안의 ‘황제 당선자’다. ‘황제(Kaiser)’란 ‘악단 중의 악단’ 베를린 필하모니오케스트라의 수장(首長)을 일컫는 별명.

1999년 6월 베를린 필 단원들은 직선 투표를 통해 래틀을 차기 상임지휘자로 뽑았다. 임기 시작은 2002년 9월. 1989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영광을 이어받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이다. 단원들은 래틀에게 ‘압도적인 표차’(베를린 필 대변인 발표)로 힘을 실어주며 황제의 권위를 확고하게 보장해 주었다.

▼40대 젊은피 단원들 압도적 지지▼

베를린 필의 새 지휘자를 뽑는 과정에서 그와 경쟁한 후보자는 다니엘 바렌보임,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제임스 레바인, 마리스 얀손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오자와 세이지 등 한결같이 세계 지휘계의 거물들이었다.

이 가운데 40대 ‘젊은 피’는 래틀 한사람에 불과하다. 그나마 실제 표결에 오른 후보는 그와 바렌보임 두 사람뿐이었다는 게 단원들의 설명이다. 이같은 선출 결과는 세계 지휘계에서 래틀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래틀은 실제 연주 활동에서도 ‘황제’다운 면모를 과시하면서 세계 음악계에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지난해 2월 오스트리아 연정에 극우 자유당이 참여하자 음악가들은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연주하지 않겠다”며 콘서트 취소를 발표했다. 래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버밍엄시 교향악단을 이끌고 빈 콘서트를 강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그는 영국 작곡가 터니지의 ‘트랙 위의 피’를 연주하며 하이더 자유당수에게 한방 먹였다. 이 작품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

지난해 11월 베를린시는 냉전시대 동서독을 대표했던 동서독의 오페라극장을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래틀과 그의 베를린 필 경선 경쟁자이자 동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인 바렌보임이 나란히 행동을 주도했다. 두 사람은 42명의 유명 음악가들과 함께 베를린시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어렵게 이룩된 문화 전통을 파괴하지 말라.” 베를린시는 서둘러 “다시 논의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래틀.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타악기를 전공, 열다섯살 때 로열 리버풀 관현악단의 타악기 주자가 된 ‘타악 신동’출신이다.

그는 관현악단 경험을 살려 지휘자로 변신, 19세 때인 1974년에는 본머스에서 열린 존 플레이어 국제지휘콩쿠르에 최연소 연주자로 참가, 1등을 거머쥐었다. 그는 25세 때인 80년 무명의 시골 악단인 버밍엄시 교향악단 지휘자로 취임해 런던 ‘빅5’ 이상의 정상급 악단으로 키워내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60여명이나 되는 단원을 정리한 뒤 최고의 인재로 악단을 재정비, 명연과 명음반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1988년 말러 교향곡 2번 음반으로 ‘음반계의 오스카상’이라는 그라머폰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고 이후 해마다 상복이 쏟아졌다.

‘래틀―베를린 콤비’의 취임 전 첫 작품인 말러의 미완성 교향곡 10번도 2000년 그라머폰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아 팬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이후 그는 음악계에서 역동성, 치밀함과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타악신동' 출신…최고의 상 휩쓸어▼

래틀이 이어받는 ‘베를린 필’의 항로가 순탄할지는 미지수다. 무뚝뚝한 아바도의 지휘봉 아래서 베를린 필의 대중적 인기는 추락했다. 아바도가 자기발로 옥좌를 걸어 내려가는 데는 ‘새로 녹음한 음반보다 카라얀 지휘의 옛 음반이 훨씬 많이 팔린다’는 안팎의 따가운 시선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래틀은 아바도를 넘어 카라얀마저도 갖지 못했던 여러 강점을 갖고 있다. 온화함과 자신감을 겸비한 매너, 악단원과 주변을 무장해제시키는 탁월한 설득력, 아울러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왕성한 탐구심 등은 그가 앞으로 세계 음악계의 ‘황제’로 군림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국내 전문가 '래틀' 평가…"떠오르는 지휘자' 1위로▼

음악 공연 전문지 ‘객석’은 1999년 11월 ‘떠오르는 밀레니엄 지휘자’를 묻는 설문을 50명의 음악평론가와 공연계 전문가에게 발송했다. 은메달은 80점을 받은 존 엘리엇 가디너. 1위는 래틀로 무려 168점을 획득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음악전문가와 팬들에게도 래틀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로 꼽힌다. 그가 녹음한 60여종의 음반 전부가 수입 또는 국내 제작돼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래틀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밀접한 관계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바이올리니스트와 협연한 음반은 단 4종뿐. 이 중 정씨와 협연한 바르토크의 협주곡 음반은 두 사람의 탁월한 호흡과 균형감각, 탄탄한 리듬감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래틀은 1994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꼭 협연해보고 싶은 아티스트였다. 녹음기간 중 정씨의 탁월한 음악적 집중력에 큰 영감과 감명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올해 5월에는 두 사람이 협연한 두 번째 음반인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앨범이 발매될 예정. 한국이 자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와 첼리스트 장한나가 래틀 지휘의 베를린 필과 협연음반을 내놓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들은 래틀과 같은 EMI음반사 소속이면서 이 레이블이 가장 홍보에 역점을 두고 있는 연주가이기 때문이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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