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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월 9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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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검찰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96년 4·11 총선 당시 안기부의 돈을 받은 정치인 명단이 ‘사정(司正)당국 자료’란 이름으로 언론에 공개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마디로 그동안 검찰이 여권과 긴밀하게 협조해 왔다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검찰은 안기부의 돈을 받은 정치인 명단과 액수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만든 적은 없다며 검찰에서 나간 자료는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보도내용이 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검찰이 그동안 여권에 수시로 전달해온 수사내용이 어딘가에서 표로 만들어졌고 이것이 유출됐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의 정치인과 액수 파악은 검찰의 계좌추적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사건의 수사경과를 돌이켜보면 여권에서 넘겨짚듯이 한마디 한 것이 며칠 뒤 검찰에서 확인되는 식이었다. 이른바 ‘안기부 리스트’ 확인설도 민주당 김대표가 처음 언급했고 이것이 결국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검찰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박순용(朴舜用) 검찰총장이 직접 나서 “이번 사건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엄정 수사를 다짐한 바로 다음날 대부분이 야당 의원인 문제의 정치인 명단이 공개됐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검찰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도대체 누가 검찰 수사를 믿겠는가.
그동안 검찰은 범죄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사항은 확인해 줄 수 없다며 여러 가지 비리의혹에 대해 입을 다물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찰도 형사처벌이 어렵다고 보고 있는 정치인 명단을 공개한 셈이 됐다. 검찰이 직접 명단을 밝힌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책임을 면키 어려운 상황이다.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안기부가 국가예산을 선거자금으로 전용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검찰이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여권과 정치적 조율을 해왔다면 이는 국기(國基) 차원에서 예산횡령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다. 검찰은 지금이라도 수사상황을 투명하게 밝히고 본연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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