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경영 버전2001]"미쳐야 산다"

  • 입력 2000년 12월 31일 17시 20분


2001년 첫날 새 아침. 지구촌 경제권을 주름잡는 초대형 초우량 기업들은 일찌감치 신발끈을 바짝 조였다. 한국기업들이 구조조정 지연과 금융시장 불안에 발목을 잡힌 사이에 글로벌 기업들은 저만큼 훌쩍 달아났다. ‘2001년판 글로벌 경영’의 화두는 무엇일까. 해가 바뀌었으니 기업마다 품는 포부도 새로울 법한데 한국에서는 누구도 선뜻 장밋빛 미래를 논하지 않는다. 변화의 폭과 속도가 워낙 크고 빠르기 때문이다. 몇개월 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다. 거품 붕괴에 따른 충격과 허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도 크다. 1년전,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벽두. 한국인들은 신경제(New Economy)의 꿈에 부풀었다. 성장률은 두자릿수에 육박했다. 그런데도 물가는 신기할 정도로 안정됐다. 주식시장에서는 닷컴 기업과 기술주가 각광을 받았다. 밀레니엄의 희망만큼이나 거품이 부풀어올랐다. 미국발(發) 호황은 전 세계로 확산됐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버금가는 신천지가 인류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거품이 꺼졌다. 그 잔해는 참담했다. 미국도 거품이 갑자기 꺼지는 ‘경착륙’을 걱정하게 됐다. 2001년 글로벌 경영은 그래서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신경제에 들떴던 2000년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되새기면서 지구촌의 기업들은 현실성

과 구체성, 실현 가능성을 새해 경영전략의 앞자리에 올려놓았다. 민간기업뿐만 아니라 정부, 공기업, 학교, 병원 등 각종 조직들도 이런 변화의 물결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이 부정의 대상은 아니다. 이미 기업경영 현장에서 활용가치가 확인된 덕목들, 예컨대 구조조정 인수합병(M&A) 등은 수준과 강도를 높여 계속된다. 과거로부터의 계승과 과거와의 단절. 2001년 글로벌 경영의 두 갈래 흐름이다.

▽좋은 것은 계속한다〓구조조정은 새해에도 거의 모든 글로벌 기업에서 유효한 경영대안으로 채택될 것이 확실하다. 기업들은 이미 불필요한 자산매각과 과잉인력 감축, 핵심사업 집중 등 일련의 구조조정이 얼마나 이로운지를 체험했다. 면도기 제조업체인 질레트는 공장 8개와 물류센터 13개를 임시로 폐쇄하고 전 직원의 8%인 2700여명을 정리하기로 했다. GM 포드 등 미국의 자동차메이저들도 과감한 다운사이징(감량경영)에 나섰다. LG경제연구원 정일재 상무는 “90년대 장기호황의 후유증을 걷어내기 위해서라도 또한번의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기업의 핵심역량을 집중하는 차원에서 전세계적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것이 새해의 큰 트렌드”라고 내다봤다. 세계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추세에 맞춰 동종(同種) 이종(異種)업체간의 국제적 네트워크도 좀더 세련된 형태로 발전할 것이다. 일본 닛산자동차 계열 부품업체인 요로즈사는 최근 미국의 자동차부품 메이커인 타워사와 제휴했다. 요로즈사는 일본 외에 태국 북미 멕시코 등에 생산거점이 있고 타워는 북미 중남미 유럽 아시아 일대에 공장을 갖고 있다. 두 업체는 각자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 부품의 글로벌적인 공급을 요구하는 완성차 메이커들의 입맛을 맞추게 됐다. 정보통신 업계에서도 기술 표준을 매개로 주요 기업들이 손을 잡고 동맹체를 형성하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 기업간(B2B) 전자상거래 등 e비즈니스 분야에서는 일종의 배타적 서클을 결성하는 것이 유행이다. 서클에 못 들어가거나 자신이 속한 서클이 세(勢)불리기 경쟁에서 지면 시장에서 퇴출압력을 받게 된다. 기업경영은 이제 개별 기업간의 경쟁에 덧붙여 서로 이해가 일치하는 기업서클간의 단체전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융합화(融合化) 융업화(融業化)를 통해 시장을 창출하려는 움직임도 기술 발전에 따라 올해에도 줄기차게 이어질 것이다. 콘텐츠와 커뮤니티의 결합,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통합 등이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과거와의 인연을 끊는다〓기업의 시장가치를 결정짓는 요인은 성장성과 수익성. 미래가치만이 최고로 대접받던 시절, 사업의 불확실―불투명성은 더 많은 수익을 약속하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10년 만의 경기둔화가 예고되는 올해, 성장성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부풀기보다는 눈앞의 ‘확실한 이익’을 중시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유한호 박사는 “투자자들의 관심이 수익성에 쏠리면서 새로운 시장과 수익원, 수익모델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전자상거래 등 e비즈니스 분야를 중심으로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M&A(인수합병) 열풍은 지난해 전세계를 휩쓸었다. 세계적으로 3만건의 M&A 발표가 있었고 인수비용은 무려 3조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외양에 비해 실속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반성도 있다. 다임러 벤츠와 크라이슬러사의 합병이 실패 판정을 받으면서 대형기업간 M&A 성공 확률이 통계적으로 30%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두 회사를 통째로 합치는 식의 직접적인 합병 대신 전략적 제휴와 같은 소프트한 대안이 유행할 가능성이 크다. ‘합병 이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발상의 전환도 있을 것이다.

▽기업가 정신의 회복〓기업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노동력인가, 기술인가, 아니면 경영진의 기발한 아이디어인가. 포천지 최근호는 미국 기업이 보유한 경쟁력의 원천을 마니아(mania), 이른바 ‘미쳐버리는 성향’에서 찾는다. 진정한 의미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퇴색하는 듯한 요즘, “미쳐야 산다”라는 다분히 도발적인 메시지가 던지는 시사점은 의미심장하다. 벤처 열풍을 대신할 기업경영의 동력은 무언가에 ‘미치는’ 기업가 정신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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