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0년 12월 25일 18시 36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올초 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출범했을 때 삼성 이승엽(24)은 “죽고 싶다”며 괴로워했다. 기자회견에서 “팀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에 선수협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발표한 뒤 그는 팬들로부터의 비난과 동료들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이제 선수협 출범 2기. 그는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팬들은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근엔 ‘이승엽 안티 사이트’까지 만들어졌다.
이승엽이 또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단 한가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팬들은 ‘국민 타자’라는 칭호를 받는 그가 전면에 나서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 팬들의 기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승엽이기에 그는 괴롭다. 아버지 이춘광씨는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런(선수협과 관련된) 얘기를 차마 못 꺼내고 있다. 본인 스스로 너무나 힘들어하기 때문”이라며 애처로워하고 있다.
대구에 내려가 있는 이승엽은 현재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있다. 휴대전화로 연락해도 공허한 벨소리만 계속 울릴 뿐 아무런 응답이 없다. 서울에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얼굴 본지도 오래 됐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는 지난해 다친 다리의 골절상 때문에 철심 제거수술을 받은 어머니 김미자씨의 병상을 지키다 친구와 만나 소주 한잔을 기울였다.
하와이 전지훈련 중인 선수들을 제외하고 대구에 남아 있는 삼성의 주전급 선수들은 최근 선수협 관련 문제로 거듭 회의를 가졌으나 이 자리에서도 이승엽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고 동료들은 전하고 있다. 동료 정경배는 “승엽이는 회의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선배들도 승엽이의 입장을 이해해 다들 안쓰러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 라이온즈는 모그룹 내에 노조가 없기 때문에 다른 구단에 비해 유독 선수협에 민감한 구단. 따라서 베테랑들도 선수협 참여 문제에 대해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승엽은 팀과 선배들을 제치고 혼자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이라고 할까.
<김상수기자>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