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이세돌 배달왕 등극

  • 입력 2000년 12월 21일 01시 09분


흑돌을 집어들고 바둑판으로 향하는 이세돌 3단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항상 자신감에 넘치던 이 3단이지만 이 순간 가슴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20일 2대2 동률에서 맞이한 %016배 배달왕전 최종국. 흑을 든 이 3단은 초반에 불리한 전세에 몰렸지만 상대방인 유창혁 9단의 대착각으로 우상귀 백 대마(○)를 아무런 대가없이 잡아 많이 따라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백이 두터웠다. 역전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부닥쳤지만 백의 응수가 정확해 희망의 불씨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유 9단이 갑자기 엉뚱한 수를 놓는다. 장면도를 보자. 백이 ‘가’의 곳에 젖혀 두면 좌하귀에 뛰어든 흑을 잡을 수 있다. 흑은 좌하귀 흑말을 사석으로 활용해 주변을 싸바르는 정도였다. 그 순간 백 1은 초읽기에 몰려 엉겹결에 둔 엉터리수. 흑이 2, 4로 나가 끊자 도리어 좌하귀 백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서봉수 9단은 “이 3단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것이다. 마치 빈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월척이 걸려든 꼴”이라고 평한다.

이 3단은 떨리는 손으로 바둑돌을 쥔 채 다시 한 번 수읽기를 하더니 흑 2의 곳에 돌을 내려놓는다. 더이상 백에게 기회는 없었다. 좌하귀 백이 잡히면서 백이 두텁던 바둑은 흑이 20집 이상 유리해졌다.

유 9단이 돌을 던지자 검토실에 있던 프로기사들과 기자들이 대국실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올초부터 32연승의 대기록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이 3단이 배달왕 타이틀을 손에 넣으며 박카스배 천원전에 이어 2관왕에 오르는 순간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3단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기성전 도전자 결정전은 양보할테니 배달왕전은 넘겨주시죠”하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솔직한 그의 어법이 그대로 드러난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지난주 유 9단과 가진 기성전 도전자 결정전에서 0대2로 패했지만 배달왕전은 품에 넣었다.

검토실에서 초초하게 바둑을 지켜보던 이 3단의 형 이상훈 3단이 발그레한 얼굴로 대국실로 들어와 잠시 복기 광경을 보더니 곧 밖으로 나갔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 계신 홀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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