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테마무비]영화관에 옛날 노래를 들으러 갔다?

  • 입력 2000년 12월 18일 10시 36분


한국 영화음악의 트렌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접속> 이후 불기 시작한 올드팝 OST. 대부분의 멜로드라마는 이 전략을 사용한다. 그리고 블록버스터 사운드트랙이 있다. 한스 짐머 류의 웅장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O.S.T. <은행나무 침대>나 <쉬리> <단적비연수> 등이 대표적이다. 인디 밴드들의 약진도 눈부시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나 <하면된다> 같은 '막가파 영화'들은 인디 밴드들의 록 사운드로 영화를 포장했다.

또 하나의 트렌드가 아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복고주의라고 해야 할까? 올드 팝이 현재 기성세대가 청소년기에 섭렵했던 미국 팝 문화의 향수를 자극한다면, 최근 몇 년 심심찮게 들려오는 '옛날 한국가요'의 흔적은 새로운 감수성이다. 3,40대 남성 감독들이 청년기에 즐겨 들었을 법한 추억의 사운드. 몇 편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꽃잎>의 주제가 '꽃잎'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70년대 사운드의 향수를 환기시켰다. 한국 가요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창법과 퇴폐적인 이미지로 기억될 김추자의 숨겨진 노래 '꽃잎'은 영화 <꽃잎>을 꽃잎처럼 장식했다. 해맑은 얼굴의 이정현이 오빠들 앞에서 김추자 흉내를 내며 춤추는 장면은 곧 있을 엄청난 폭력(광주항쟁과 강간)과 대비되는 '순수의 결정체'를 연상시킨다.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가 시대 배경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며 흐르기도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는 의외의 장면에서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버스를 타고 가는 한석규, 그가 창 밖을 바라볼 때 마치 버스의 적당한 속도처럼 가벼운 리듬으로 흘러나오는 김창완의 목소리는 영화의 한적한 분위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선곡'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요'라고 하면 '뽕짝'이 빠질 수 없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에서 송강호는 직장 동료 조은희를 짝사랑한 나머지 꿈속에서 그녀를 위한 세레나데를 바친다. 한때 '한국의 엘비스'로 통하던 남진의 '마음이 고와야지'. "새카만 눈동자의 아가씨∼" 도저히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끼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남진의 노래를 부르는 송강호의 복장은 무슨 밤무대 3류 가수 같다. 그렇다면 조은희의 답가는? 이은하의 '미소를 띠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단란주점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조은희 앞에서 송강호는 만취한 채 상관에게 '헤드록'을 당한다.

<박하사탕>의 '나 어떡해'는 노래라기보다 절규에 가까웠다. 삶의 모든 의미를 잃은 채 자살을 기도하는 설경구는 20년만에 만난 옛 친구들 앞에서 한 곡의 노래에 자신의 심정을 담는다. 그리고 달리는 기차 앞에서 소리 지른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의 소망이 통했던 것일까?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는 '다시 돌아간다'.

노래 제목이 아예 영화 제목으로 탈바꿈한 경우도 있다. <킬리만자로>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따온 이름. 대중목욕탕에서 그 특유의(정말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목소리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는 안성기의 목소리는 목욕탕의 웅웅거리는 사운드와 합쳐져 묘한 화음을 이룬다.

여기에 <공동경비구역JSA>의 김광석과 한대수, <순애보>에 흐르는 제목도 가물가물한 이난영, 루비나, 박재란의 노래들, 23일 개봉할 <불후의 명작>에 흘러나오는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까지 합치면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들어도 될 만큼 수많은 옛 노래들이 한국영화의 선율을 채우고 있다. 이건 도대체 무슨 현상일까? 숨가쁘게 달려가는 세상, 영화관에 앉아 한가하게 옛날 노래 타령이라니…. 퇴행일까 아니면 향수일까? 그것도 아니면 잠깐 유행하다 사라질 또 하나의 트렌드일까?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 wood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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