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 農 事(농사)

  • 입력 2000년 12월 3일 21시 06분


農 事(농사)

農―농사 농 糧―양식 양 社―땅귀신 사

堤―방죽 제 耕―밭갈 경 刈―풀벨 예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것이 제일 큰 문제다. 누구든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겼으며 나라는 糧食(양식)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歷代의 民亂(민란)이 거개가 먹는 문제 때문에 일어났음을 볼 때 帝王들은 어떻게 하면 백성을 먹일 수 있느냐를 國政의 가장 큰 일로 여겼다. 그래서 帝王이 처리해야 할 8가지 중요한 나랏일(八政)을 두면서 먹이는 문제, 곧 ‘食’을 으뜸으로 꼽았다.

농경민족이었던 까닭에 좋든 싫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했던 만큼 땅에 대한 애착은 신앙이 되다시피 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社稷壇(사직단)은 그래서 생겨났다. 땅귀신과 곡식신을 제사지냈던 곳으로 무릇 제왕이라면 宗廟(종묘)와 함께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었다.

또한 그 땅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던 우리네 조상들은 萬事 중에서도 農事가 제일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런 말도 나왔다. ‘農者, 天下之大本’. 조선시대 ‘四民’의 구별을 두어 匠人과 商人은 그토록 천시했으면서도 農夫만큼은 그래도 선비 다음으로 꼽을 줄 알았던 우리들이었다.

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최초로 벼 農事를 짓게 된 것은 百濟 多婁王(다루왕) 6年(33)이다. 2000년의 역사다. 이 때부터 우리는 줄곧 重農政策을 실시해 왔다. 水路를 내는가 하면 堤防(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백성을 부리되 農事철을 건드리지 않았다. 수시로 農事의 중요성을 일깨우는가 하면 왕이 직접 모범을 보이기 위해 쟁기를 잡았으며(親耕) 추수 때에는 친히 임하기도 했다(觀刈). 그 뿐인가. 풍년을 비는가 하면(祈穀) 행여 비가 오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면서 빌었다(祈雨). 심지어는 씨앗을 바치고(獻種) 보관하는 데에도(藏種) 莊重한 儀式이 따랐다. 이처럼 農事에 대한 경건한 마음은 종교를 능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 옛 일이 되었다. 마땅히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하겠지만 重農에서 輕農이 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賤農으로 바뀌었다. 廢農宣言이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이니 만큼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는 百姓으로 근본을 삼고, 百姓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법인데, 農事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帝王의 政治에서 먼저 힘써야 할 부분이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農者衣食之源, 而王政之所先也.) 世宗大王이 하신 말씀이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e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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