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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1월 28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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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문제 밀실서 광장으로▼
장기간에 걸친 의사들의 휴폐업으로 인해 수많은 환자들이 감수해야 했던 불편과 불이익에 대해 의사들은 크나큰 짐을 지게 됐다. 신뢰를 절대적 매개로 하는 것이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에 일련의 사태에 대한 국민 일반의 실망은 그만큼 더 컸을 것이고 배신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을 더욱 들쑤셔 놓았다는 지탄까지 받으면서 의사들은 의사들대로 ‘광장’과 ‘밀실’ 사이에서 저마다 심하게 멍이 들었다. 참으로 유감이다. 국민 일반과 의사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몸담고 있는 의료계 내부에서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이제 의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일상의 현장에서 일과 병행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일부는 지금과 같은 사태 수습국면에 만족할 수 없다며 ‘계속 투쟁’을 이야기한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를 가리는 것은 이 시점에서 적당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의료의 문제가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광장에는 의사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의료 문제를 둘러싸고 나란히 서있다는 사실이다. 이 광장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은 더 이상 서로에게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의료 문제를 풀어가야 할 사람들이다.
사실 그 동안 ‘개혁은 정부가 독점하고 도덕성은 시민단체가 독점하는’식의 구조에서 의사들은 아무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채 고군분투한 측면이 있다. 언론도 의사와 정부를 모두 비난하는 양비론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전달해주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의사들은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전개될 과정은 일방적으로 의료계의 요구를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면서 대화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 과정은 물론 매우 힘들고 피곤할 것이다. 오죽하면 ‘민주주의는 가장 피곤하고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말이 있을까. 그러나 ‘민주주의는 훈련’이라는 말도 있다.
상당수가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을 이번 ‘투쟁’ 과정을 통해서 의사들은 정부 정책에 대해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은 좋은 경험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건전한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민주국가에서 민주시민은 누구나 요구할 권리와 책임을 지는 의무를 동시에 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바탕에는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테두리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누구나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의사들에게 과연 사회성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의문이 일각에서 심각하게 제기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 전반의 발전 단계와 관련해 매우 시사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집단이 있느냐’고 의사들이 되물을 필요는 굳이 없을 것 같다.
▼국민-의사-정부 서로 이해를▼
이번에 제기된 여러 문제들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제될 때 진정한 해결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의료문제가 제대로 된 해결 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의사들의 힘만으로는 안되며 의료문제에 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노력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시민단체와 정부는 의료계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1977년 의료보험 도입 이후 쌓여온 정부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종식시켜 달라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사들도 이제 보다 냉정한 시각으로 의료문제들을 바라봐야 한다. 정부의 잘못을 탓하되 정부를 미워하지는 말아야 한다. 다시 밀실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 앞에 펼쳐진 광장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얘기해야 된다.
지제근(서울대 의대 교수·대한의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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