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김대통령의 침묵

  • 입력 2000년 11월 22일 18시 20분


참 궁금하다. 지난 17일 밤 국회에서 벌어진 ‘정치 코미디’의 시나리오는 누가 썼을까. 현장 감독이야 직책상 민주당 원내총무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당 밖에서 원격조종하는 총감독은 없었을까.

궁금한 것은 또 있다. 그날 밤 민주당 총재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을까. 김대통령은 그날 오후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를 마치고 브루나이에서 귀국했다. 한밤중 민주당의원들이 국회의장실에서 벌인 ‘코미디’장면을 총재가 TV로나마 직접 보았는지 궁금하다. 여당의원들이 자당 소속 국회의장이 사회를 보지 못하도록 의장실에 가둬놓고 있는, 더구나 극적 효과를 높이려는 전략에서인지 여성의원들을 앞세운 참으로 희한한 정치드라마를 대통령이 직접 보았다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랐을까.

‘당에서 알아서 할 일’

김대통령이야말로 토론과 타협, 다수결의 원칙을 강조해 온 의회주의자이다. 김대통령은 2개월여 전 방송 3사 특별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는 국회법에 의해 운영돼야 한다. 안건을 상정 토론하고 협상을 해서 합의가 되면 만장일치 통과시키고, 안되면 표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끄는 당의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반(反)민주적 반(反)의회적 행태를 대통령은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더 궁금한 게 있다. 그날 밤 검찰수뇌부에 대한 탄핵안을 무산시키기 위해 민주당이 짜낸 치밀한 전략을 대통령이 미리 보고받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청와대측의 입장은 국회 일은 당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번 일도 일일이 보고받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까. 탄핵안 처리가 국내 정치의 최대 현안인데다 이를 무산시킨다는 원칙은 진작 섰더라도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에 따라 정국에 미치는 파장이 엄청나게 다르리라는 것을 정치 ‘선수’들이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전략을 당총재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당에서 알아서 했겠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이번 일보다 훨씬 사소한 것까지 직접 챙기는 대통령의 평소 업무 스타일로 보아 탄핵안 처리를 당에 전적으로 맡겨놨겠느냐는 점이다.

더욱 의문스러운 점은 18일 오전 탄핵안 처리에 대한 국회상황을 정무수석으로부터 보고받은 대통령의 태도다. 김대통령은 보고를 듣기만 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침묵의 의미는 뭘까. 일 처리를 잘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했다는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예상했던 대로 야당은 모든 국회일정을 거부, 국정은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이러니 검찰 살리려다 나라 망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민주당 내에서는 당쇄신론이 만만찮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김대통령은 지난 여름 민주당의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처리로 빚어진 정국경색때도 상당기간 침묵을 지켰다. 그러려면 당총재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충실하는 게 옳지 않느냐는 소리도 적지 않았다. 총재는 당의 최고책임자다. 소속당 의원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당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듯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낮아지는 ‘心感온도’

김대통령은 오늘 또 출국한다. ‘아세안+한중일’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상외교에 대한 대통령의 열정은 대단하다. 그러나 김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는 최악의 상태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와 내일신문의 월례 여론조사(11월11∼13일)결과를 보면 김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최하인 34.5%로 떨어졌다. 탄핵안 파동이 있기 전의 조사인데도 그렇다. 지난달 조사결과는 46.5%였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국민의 정부 출범이래 처음으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역전돼 민주당 30.5%, 한나라당 33.1%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김대통령은 12월 초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또 출국한다. 그때쯤이면 정치판이 좀 풀릴지 모르겠으나 경제상황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들 한다. 어느 해보다도 스산하고 추운 겨울이 될 것 같다. 국민이 마음으로 느끼는 심감(心感)온도는 체감(體感)온도보다 훨씬 더 낮아질지도 모른다.

<어경택 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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