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로비디오 촬영현장]"B급영화요? '젓소'시절얘기죠"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9시 00분


서울 강남구 양재동 주택가에 있는 작은 빌딩 지하. 에로비디오 세트장이어서 그런지 입구에는 간판 하나 없다.

“자! 얼른 하자, 날 새겠다.” ‘시네프로’ 이강림 감독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눅눅한 시멘트 냄새와 쇠사슬 소품이 음습한 분위기를 더한다. 촬영작은 여자 환자를 유린하는 사이코 의사의 엽색 행각을 다룬 작품.

“조용! 레디!”

감독의 지시에 조명이 들어오고, 목욕 가운을 걸친 여배우 3명이 매트리스에 눕는다. 갓 스물을 넘긴 듯한 앳된 얼굴. 스타킹으로 양손이 묶여 있다.

◆ 극영화 못지않은 진지한 자세

“애들 오픈시켜!”

코디네이터가 재빨리 가운을 벗기자 슬립으로 간신히 가려진 맨살이 드러났다. 구석에 놓인 가스 온열기 한 대가 한기를 가까스로 녹이고 있다. 누군가 매캐한 연기가 피어나는 양은 세숫대야를 들고 온다. “커피 원두 태운 거예요. 드라이아이스로 연기를 만드는 ‘포그머신’ 대용이죠.”

디지털 카메라를 들여다보던 감독이 우렁차게 “액션!” 사인을 낸다. 의사 가운을 벗은 남자 배우의 우악스런 손길에 여배우의 신음소리가 리얼하게 얹힌다. 곧 이어 “컷!” 사인. “야! 라인 좀 치워!.” 오디오맨이 카메라 앵글에 들어온 오디오 선을 황급히 치운다.

한 장면을 마치는데 몇 번의 NG가 났다. 어느새 배우의 등줄기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들이는 정성이나 대하는 진지함이 35mm 극 영화 못지 않다. ‘설악산으로 촬영 가면 세 편은 찍는다. 설악산에서 하나, 가고 오는 차안에서 하나씩’. 에로영화의 ‘졸속제작’을 비웃는 우스개도 옛말이다.

“이런 곳까지…”. 일간지 기자가 촬영현장에 온 것은 처음이라며 이 감독이 세트장으로 안내했다. 다양한 모양의 침대와 의상, 기묘한 기구 등 다양한 소품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미소녀 자유학원’ 시리즈에 쓰였을 여고생 교복도 눈에 띤다. 99년초부터 출시된 이 시리즈는 입소문만으로 매편 1만장 가까이 팔려 95년 ‘젖소부인’ 시리즈의 흥행을 넘어섰다.

◆ "작품성 없으면 고객이 외면"

“성공 요인요? 비디오 영화 고객을 20∼30대로 낮춘 것이죠. 젊은 여배우를 쓰고 원조교제 같은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삼은 것이 주효한 것 같습니다.”

CF감독 출신인 이 감독은 ‘실연 같은 연기’ 뿐 아니라 완성도를 강조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대안이 없다. 지난해의 3배가 넘는 70군데의 제작사가 매월 8만장의 비디오를 쏟아낸다. 편당 2000만∼3000만원의 저렴한 제작비와 현금 거래가 ‘뜨내기 업체’의 난립을 부추겼다.

지난해부터 20,30대 초반으로 주 소비자가 확대돼 작품성은 더욱 중요해 졌다. 스토리를 무시하고 베드신에만 치중해서는 이들의 손길을 잡지 못한다. 한 장면에서 속옷이 바뀌는 편집 착오로는 꿈도 못꿀 일이 됐다. 물론 ‘과부들의 저녁식사’ ‘섹스매거진2580’ 식의 얄팍한 제목으로 눈길을 끄는 것도 한 물 간지 오래다.

◆ 여배우 발굴 가장 큰 어려움

관건은 ‘새로운 에피소드, 새로운 앵글, 새로운 여배우’ 3박자다. ‘시네프로’는 ‘인터넷 성범죄’나 ‘엽기’ 같은 최신 소재로 차별화 전략을 삼고 있다. ‘클릭’은 영화 못지 않는 고급스런 화질과 드라마 뺨치는 스토리를 겸비한 고급화 전략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불멸의 사랑’ ‘연어’ 등 ‘신귀족주의’ 시리즈가 ‘준 대박’을 기록해 에로물이 ‘싸구려’란 인식을 불식시키고 있다.

하지만 여배우 자질이 최대의 성공 카드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젖소부인’ 시절처럼 20대 후반 여배우를 쓰면 망한다는 것이 최근의 현실이다.

‘클릭’의 이승수 대표의 가장 큰 애로도 캐스팅이다. “고급 유흥업소 종사자만 되어도 섭외가 쉽지 않아요. 건전한 에로영화를 포르노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쉽게 카메라 앞에 얼굴을 못내밀죠.”

덕분에 여배우의 몸값이 크게 올랐다. 요즘 1급 에로 여배우의 개런티는 ‘일당’ 50만∼60만원선. 지난해 불황기에 비해 두 배 이상 올랐다. 외모가 빼어난 ‘스타급’이면 1000만∼2000만원에 전속계약하기도 한다. 남자 배우 개런티는 여배우의 절반 수준.

◆ "강제규감독도 이만큼 못만들것"

탤런트의 꿈을 접고 1급 에로배우로 활약중인 유진(가명)씨는 “여러 작품에 연달아 나와야하기 때문에 2년 넘게 활동하면 ‘용도 폐기’된다”면서 “요즘에는 성인 인터넷방송 진행자로 겸업해 수명을 연장하는 배우도 많다”고 전했다.

열악한 제작환경속에서도 업계 종사자의 자부심은 상당하다. 이 대표는 “제 아무리 임권택 강제규 감독도 3일만에 찍고 4일만에 편집해서 이만큼 못만든다”고 자신한다.

최근 에로 비디오가 고액에 수출된 것도 자신감의 근거다. ‘시네프로’나 ‘클릭’은 얼마전 일본 비디오 배급사에 서너편을 편당 1만달러에 팔았다. 웬만한 B급 35mm 극영화의 해외 판권과 맞먹는 가격이다.

그래도 업계 종사자들이 체감하는 사회적 냉대는 여전하다. 이들이 꿈은 한결같이 35밀리로 에로영화로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는 것.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는 이런 설움 때문일까.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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