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손창섭 '잉여인간'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5시 50분


◇문단의 이단아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손창섭은 1984년, 일본으로 귀화한 후 일체의 신상이 비밀에 부쳐진 작가이다. 손창섭의 일본행은 망명인가, 도피인가. 세간에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작가는 일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의 작품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손창섭의 일본행이 내포하는 의미는 여전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손창섭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소설이 인간에 의해, 인간에 관해 씌어진 읽을거리라고 할 때,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그가 그리는 인간상은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간 자체에 대해 냉소'로 일관된다.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먹고 배설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그림으로써 인간을 동물적 존재로 전락시킨다.

손창섭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환멸은 6. 25 체험과 피난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부산 피난시절 많은 사람들은 임시로 지어진 가건물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손창섭의 생활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바라크'라고 불리는 가건물에서의 생활은 오물처리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상수도 시설은 상상도 할 수조차 없는 생활이었다. 바라크에서는 어떤 인격적 생활도 불가능했으며, 극한적 상황에 내몰린 절박한 인간으로서의 생명 유지만이 가능했다.

손창섭은 이러한 극단적인 생활에 처해진 인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손창섭 소설에 인물들은 동물원 우리 속에 갇힌 동물을 보고 있는 듯한 관찰자적 시선을 통해 희화화되고 있다. 그러기에 손창섭의 문학을 폭로의 문학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는 극한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이 드러내는 추한 면들이 작가의 냉소적 시각에 의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이러한 폭로는 인간 본질에 대한 폭로라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 중 한 측면에 대한 폭로다. 즉 손창섭은 인생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 단면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이 지닌 수성(獸性:사람이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성질)을 폭로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손창섭의 소설이 대체로 인생의 단면과 상황에 대한 묘사에 적합한 단편소설 양식을 취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그는 한국문단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손창섭 소설은 특히 당대의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작품 속에 드러나 있는 우중충하고 암울한 분위기,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인물들의 심리상태, 불구적인 인물들이 드러내는 자조의식과 자기모멸의 감정 등이 전후의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를 대변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 세대들은 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에게서 자조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그 인물들을 통해 자기 연민의 감정까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존적 허무주의자의 암울한 세계 인식

손창섭은 1922년 평남 평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함께 의붓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갔다. 1935년부터 10여 년간 만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교토와 도쿄에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나왔으며, 니혼 대학에서 수년간 수학했다. 1946년 해방이 되자, 귀국해 자신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해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갔으며 이때 교사, 잡지 편집기자, 출판사원으로 일했다. 1961년 그는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기 전 〈신의 희작〉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자전적 소설이며, 자신의 현실에 대한 고단한 경험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1949년 단편 〈얄궂은 비〉를 《연합신문》에 발표하면서 정식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잡지《문예》에 〈공휴일〉(1952), 〈사연기〉(1953) 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오는 날〉 〈잉여인간〉 은 모두 1950년대에 창작된 소설로 이 작품에는 단신으로 월남하여 겪은 전쟁과 난민체험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혈서〉 (1955), 〈미해결의 장〉 (1955), 〈인간동물원초〉 (1955), 〈유실몽〉 (1956) 등의 작품에서도 어둡고 암울한 현실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허무주의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

이후 그는 1960년부터 1984년 일본에 귀화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작품을 창작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평단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것은 손창섭의 소설세계가 1950년대의 상황 속에 갇혀있어, 새로운 시대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대에 김승옥을 비롯한 새로운 문학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손창섭은 당대의 현실상황을 적확하게 포착했으나, 그 현실을 역사적으로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을 역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단적인 증거는 4. 19 혁명과 5. 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가 보여준 태도에서 발견된다. 그는 그 사건들에 대해 침묵한 채로, 자기풍자를 하고 있는 장편소설 〈부부〉(1962), 군사혁명에 대한 알레고리 소설 〈청사에 빛나리〉(1968), 타락과 부패로 가득 찬 서울에서의 삶의 모험과 실패를 통해 재출발하는 시골 출신 소년의 상경기 〈길〉 (1969) 등의 작품을 썼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서만기와 채익준, 천봉우는 중학교 동창생이다. 서만기는 만기(萬基)치과 원장인데, 채익준과 천봉우는 치과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작은 일에도 비분강개하는 채익준은 병든 아내에게 주사라도 놓아주겠다고 공사판에 일을 나갔다가,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다. 6. 25를 겪으면서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간호사인 홍인숙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천봉우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아내에게 생활을 의지하면서 산다. 치과의원의 건물주인 봉우의 처는 갖은 핑계를 대어 치과에 드나드는데, 그것은 만기에 대한 호의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어느날 봉우 처는 병원 일로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며 만기에게 병원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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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현(연세대 국문학 강사/북코스모스 가이드북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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