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벤처와 정치 ‘잘못된 만남’

  • 입력 2000년 11월 2일 19시 24분


국민 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급여(생계비)가 처음 지급된 지난달 21일. MBC TV의 9시 뉴스는 가슴 찡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장애인 아들과 함께 사는 하무돈 할머니(65·인천 숭의동)는 이날 38만원을 받았다. 기자가 물었다. 그 돈을 어디에 쓰실 것이냐고. 할머니는 대답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인) 손자 학원에 보내야지요.”

생계비를 받아들고서, 관절염을 앓고 있는 이 할머니는 돈 없어 학원 한 번 보내지 못했던 손자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가슴이 아릿했다.

우리의 교육열은 언제나 이랬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교육열 때문이었다. ‘나는 못먹고 못입어도 자식들은 공부시켜야 한다’는 그 정신이 근대화의 밑거름이 됐다.

요즘의 벤처 역시 이런 교육열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한국이 정보통신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앞서 갈 수 있는 이유로 ‘준비된 인프라와 준비된 인재’를 꼽는 사람들이 많은데 ‘준비된 인재’는 교육열 없이 나올 수가 없다.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서울 강남의 경우 초등학교 5, 6학년이면 컴퓨터 워드프로세스 3급 자격증을 딴 아이들이 학급당 5, 6명은 된다. 이들이 미래의 벤처 주역이고 지식정보화시대를 이끌 인재들 중의 하나인 셈이다.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이 벤처 열풍에 찬물을 끼얹긴 했지만 벤처가 디지털시대에 하나의 대안임은 부인할 수 없다. 문화적 정서적으로도 한국인에게는 벤처가 맞다고 한다. 한국인의 ‘냄비기질’까지도 벤처에는 유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는 기질 탓인지 자고나면 기술이 바뀌는 벤처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얘기다.

벤처가 성공하려면 역시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한다. 정치가 경제에 개입해 일이 제대로 된 경우를 본 적이 없지만 벤처는 더욱 그렇다. 어떻게 보면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치는 인간관계의 총화라면 벤처는 기술, 즉 비인간성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얼마전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진짜 벤처기업인들은요, 어쩌다 식사라도 함께 하면 밥값은 각자가 내자고 해요.” 그럴 법하다. 기술로 승부를 내는 사람들에게 관(官)이나 정치란 별로 중요하지가 않을 터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10대 디지털 강국’을 국가적 어젠더로 설정한 것은 방향면에서 틀리지 않는다. “벤처열풍을 조장했다”는 일부 비판이 있긴 해도 국가적 목표를 세우고 목표달성을 위해 자원을 동원하는 것은 정치적 리더십의 기본이다.

한 벤처기업인의 삐뚤어진 행각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그를 둘러싼 기만과 유혹의 고리에 정치가 있다는 것이 세간의 의혹이다.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실이라면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설정한 국가적 어젠더를 ‘정치’가 밑에서부터 흔들어버린 꼴이 되고 만다. 이런 일들로 인해 벤처가 마치 ‘시대의 죄인’인양 비쳐지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재호<정치부장>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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