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거대 규모의 판타지 멜로<단적비연수>

  • 입력 2000년 11월 2일 13시 40분


<단적비연수>는 말을 많이 생성시키는 영화다. 거대 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됐기 때문에도 그렇고, 이 영화의 태생이 <쉬리>의 제작사인 (주)강제규 필름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여러 가지 무성한 소문 속에 모습을 드러낸 <단적비연수>는 과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상업영화로서 이 정도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었다. <단적비연수>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김희경 기자와 황희연 기자의 상반된 리뷰를 싣는다(편집자 주).

Another View-시선 1

<단적비연수>는 사이즈가 큰 영화다. 촬영 일수 약 9개월, 촬영 회수 총 105회, 촬영 커트 수 약 2,500커트. 웬만한 한국영화의 촬영일수가 3개월 남짓이고 총 촬영 회수가 50회를 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적비연수>는 평균 이상의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은 영화인 셈이다.

<단적비연수>가 이렇듯 제작 공정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태생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단적비연수>는 96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었던 <은행나무 침대>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2편 격의 영화이며, <쉬리>로 한국 최고 흥행 신기록을 세운 (주)강제규 필름의 차기작이다. 게다가 국내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인 총 45억 원을 들인 만큼, 벌어야 할 돈도 많아졌다.

11월1일 첫 공개 시사회를 가진 <단적비연수>는 투자한 돈과 들인 시간 만큼 번지르르한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CG 사용분량은 총 촬영 분량의 40%를 웃돌았으며, 배우들이 입고 있는 의상과 야외 세트의 규모 역시 거대했다. "문제는 사이즈"라고 외쳤던 <고질라>의 구호를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일단 성공작인 셈이다.

천년을 넘나드는 애절한 사랑의 전설 <은행나무 침대>.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 자리엔 여전히 사랑이 있다.

영기가 살아있는 신산(神山) 자락에 터를 닦은 적대적인 부족 매족과 화산족. 영화는 큰 욕조 안에 선혈 낭자한 피를 퍼트리는 아이 비(최진실)의 탄생 장면으로 시작된다. 비는 매족의 여족장 수(이미숙)가 화산족 남자 한(조원희)과 몸을 섞어 잉태한 아이. 예언자는 오직 비만이 분노한 신산의 정기를 위무할 수 있는 제물이라 설파하고, 예언을 믿은 수는 부족의 운명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거리낌 없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렇듯 운명적으로 태어나자마자 신산의 마지막 제물로 바쳐진 비는 그러나 수의 칼에 목이 잘리기 직전 아버지의 손에 구출된다.

흔히 아버지는 대의를 중요시하고 어머니는 가족에 대한 애정 때문에 큰 일을 망치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단적비연수>는 그 틀을 완전히 뒤바꾼다. 이것은 모성애의 신화를 거스르는 아주 도발적인 시작이다.

아버지의 손에 구출돼 화산 마을에서 살게 된 비는 이제 예쁜 처녀로 자라나 사랑할 나이가 된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인물은 활달하고 무난한 성품의 단(김석훈). 하지만 비와 단의 사랑은 곧 복잡한 사각관계에 얽혀든다. 화산 마을의 공주 연(김윤진)과 결혼을 약속한 화산족 족장 적(설경구)이 단과의 우정 때문에 다독여 두었던 비에 대한 연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잊으려 할수록 더 진해지는 사랑을 인정한 적은 족장이라는 명예를 내팽개친 채 비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부족의 운명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네 사람의 비극은 가끔씩 끼어 드는 어설픈 액션 때문에 깊은 슬픔을 자아내지 못한다. <단적비연수>는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에 몸을 푹 담궜다면 더 나았을 뻔한 영화. 네 사람의 애증 섞인 칼부림은 비극을 견고히 하기 위해 마련된 중요한 장치였으나, 화려한 <비천무>의 액션을 본 관객들에겐 러브 스토리를 방해하는 '거친 돌'처럼 느껴질 뿐이다.

<단적비연수>는 화려한 캐스팅으로 제작 전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는데, 배우들의 연기는 설익는 감자처럼 맛이 없다. <박하사탕>에서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설경구는 애절한 적의 캐릭터에 흠뻑 녹아들지 못했으며, 수 역의 이미숙은 캐릭터 자체의 내공이 약한 탓에 카리스마 넘치는 여족장의 이미지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쉬리>에 이어 여전히 사랑하는 남자에게 활시위를 당기는 비운의 여인상을 연기한 김윤진, 풋풋하고 건강한 모범 청년의 전형을 보여준 김석훈, 순정만화처럼 애잔한 느낌의 비를 연기한 최진실 역시 새로운 도전보단 기존의 이미지를 답습하는 데 그쳤다.

어차피 <단적비연수>는 연기보다 스케일로 승부수를 던진 영화지만, 사이즈만으로 승부하기에 이 영화는 너무 좋은 배우들과 든든한 제작사를 뒤에 업고 시작했다. 관객의 기대치는 저절로 높아진 것이 아니라 이런 든든한 뒷 배경 때문에 일어난 자연스런 화학반응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뜸을 너무 많이 들인 이 영화는 타기 일보 직전에 화력을 조절한 기색이 역력하다. 촬영에 공을 많이 들이느라 특수효과에 들일 시간이 부족해진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특수효과로 빚어낸 나이 든 은행나무는 너무 초라해 보인다. 11월11일 개봉.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Another View-시선 2

‘단적비연수’는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제작을 맡았다는 이유 때문에 기획 단계부터 주목을 받아온 대작이다. 45억원의 제작비를 들였고 촬영현장에 투입된 인원만 평균 100명인데다 경남 산청군 황매산 자락에 대형 오픈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최진실 이미숙 김석훈 설경구 김윤진 등 출연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1일 시사회에서 공개된 ‘단적비연수’는 ‘은행나무침대 2’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은행나무침대’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은행나무 침대’에 묘사됐던 전생(前生)보다 더 앞서는 전생을 소재로 삼았다.

고대의 어느 한 시기, 신산 기슭에 살던 매족은 천하를 얻으려 화산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다 신산의 저주를 받아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난다. 매족의 여족장 수(이미숙)는 부족의 재건을 위해 화산족의 왕족을 유혹해 비(최진실)를 낳는다. 비를 제물로 바쳐 신산의 맥을 끊는 것이 매족이 부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그러나 비는 죽음 직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화산족에게 맡겨지고, 단(김석훈), 적(설경구), 연(김윤진)을 벗삼아 자란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알지 못한 채 비는 단과 사랑에 빠지지만, 엇갈린 인연의 비극은 이들을 비켜가지 않는다. 적은 비를 연모하고, 연은 그런 적을 사랑한다. 불길한 사건들 이후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비는 화산족의 불행을 막기 위해 신산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복잡한 줄거리의 가닥이 잡힐 때까지 약간 어수선하고 단,적,비,연의 어린 시절 묘사가 너무 긴 초반부를 지나면 이 영화가 데뷔작인 박제현 감독이 ‘쉬리’의 시나리오를 공동작업했던 이력이 장면마다 드러난다. ‘쉬리’처럼 비극적 멜로와 액션, 두 테마에 고른 비중을 둔 이 영화에서 처연한 눈빛으로 사랑하는 사람인 적을 향해 화살을 겨누는 연은 같은 배우가 연기한 ‘쉬리’의 여전사 이방희와 아주 흡사하다. 멜로의 사이 사이에 자주 배치된 속도 빠른 전투장면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찍은 거친 화면으로 긴박감을 자아낸다.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고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를 사랑하는 단과 적이 놓여 있다. 운명에 순응하는 단의 조용한 애정과 운명을 거스르려는 적의 거친 열정, 이별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과 집착하는 사랑이 이 영화의 주된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비극적 구도에 비해 감정의 상승 효과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 영화는 출연배우들이 이전 영화에서 성공적으로 구축한 이미지에 꽤 많이 기대고 있기도 하다. ‘쉬리’의 여전사를 연상시키는 연 뿐 아니라 끝내 도달할 곳에 이르지 못하고 파멸하는 적을 연기한 설경구가 광기어린 집착을 보여줄 때면 ‘박하사탕’의 영호가 오버랩된다. 수 역을 맡은 이미숙은 다른 네 명의 배우에 비해 출연 장면이 많지 않으나 부족의 재건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여족장의 카리스마를 표현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11일 개봉.

김희경 <동아일보 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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