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깊이듣기]클래식을 들으면 부자가 된다?

  • 입력 2000년 11월 2일 13시 26분


주말 저녁 '지구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 있자니 TV에서 영화 '딥 임팩트'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영화 볼 여유를 찾지 못하고 지낸 지 오래지만, 재난 또는 종말에 관한 영화를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는지라 자세를 고쳐잡은 뒤 정색하고 TV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 갑자기 반가운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푸치니 '라보엠'중의 이중창 '미미여, 그대 돌아오지 못하리' 였다. '재난 영화에 웬 오페라?'하고 생각했다. 화면을 수놓고 있는 것은 깊은 산속의 천문대. 외롭게 연구생활을 수행하고 있는 노 천문학자가 천문대안이 떠들썩하게 오디오를 켜놓은 것이었다. 순간 뭔가 개운치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아닌데….'

'머리좋은 학자가 클래식을 듣는다' 라는 것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반가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영화 '레옹'의 베토벤을 즐겨 듣는 사이코 경찰간부, 하루키의 단편 '빵가게 습격'에 등장하는, 바그너를 들으면서 햄버거 가게를 터는 주인공 등등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상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됐다. 어딘가 외곬수고, 고독하고, 편집증적인 인물을 나타내는 아이콘으로서 클래식이 상징성을 띠기 시작하는 현상이란 뜻이다.

기억력이 좋지 못해 일일이 예를 들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아마데우스' '불멸의 연인' 등 최근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성공한 영화들에서도 대음악가들은 영락없는 사이코에 다름 아니었다.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오페라 '앙드레아 셰니에'의 아리아가 나왔을 때 반가워한 음악팬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주인공이 설명하는 장면을 통해 '머리좋고 독자적 성향을 지녔지만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섬약한 인물'을 영화가 묘사하려 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반면 '반가운' 징조들도 있다. 최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필두로 '부자되는 방법'에 대한 실용 경영서가 여럿 나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에서는 부자되는 투자가의 조건으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들고 있다. 이유인즉,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뚜렷한 취향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 비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취향을 가진 '똑똑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독일 외무장관의 달리기 예찬 '나는 달린다'에서도 저자는 '달리기에 기쁨을 느끼게 되자 예전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던 클래식이 귀에 깊이 들려오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삶을 적극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음악듣는 취향마저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분명 반가운 이야기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좋건 나쁘건 클래식 듣는 사람을 별종처럼 취급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주변의 경우 부자중에는 클래식 듣는 사람이 분명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부자가 된 뒤 클래식을 듣기 시작한 사람이었고, 클래식을 들으니=똑똑해서=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대학교수가 클래식을 많이 듣는 것 같기는 했지만, 모두 교유의 폭이 넓고 원만한 성품이어서 '외곬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클래식 광에 대해 특정한 이미지를 고집하는 것은 바라건대 제발 피해주시길.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고정관념이 있다. 클래식이란 '어려운 것에서 굳이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 '차 향내를 가려내는 것처럼 독특한 감식안이나 감별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최소한 나는 아니다. 나는 섬광처럼 눈을 멀게 하고 폭풍처럼 휘몰아쳐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뚜렷하고도 굉장한 것 아니면 예찬하지 않아 왔다. 너무도 아름다워 밤에 잠이 오지 않게 하는 것 아니면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내게 클래식에의 사랑은 '차향처럼 어른어른한 것 중에서 의미를 굳이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별없는 사춘기의 사랑처럼 사람을 어쩔 줄 모르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10대 아이돌 스타의 팬들처럼 새벽에 슬리핑백을 들고 긴 줄을 서보거나 무대 앞에서 소리지르며 눈물흘린 적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그것은 전 존재와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이 케케묵은, 유행이 지난, 낡은, 구래식(舊來式) 음악이 말이다.

<유윤종 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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