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吉林댁의 등나무

  • 입력 2000년 10월 23일 18시 50분


한 중국동포 여인이 있다. 1956년 중국 지린(吉林)성 출생이니까 흔히 말하는 조선족 동포다. 여인을 길림댁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길림댁은 8년전 초여름 한국에 왔다. 그 무렵 수많은 중국내 조선족 동포들이 그랬듯이 길림댁은 큰 돈을 벌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잘사는 나라’ 한국을 찾았다. 길림댁의 마음 속에 한국은 ‘아름다운 섬’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중국에서는 ‘지게에 질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나라.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한 핏줄 같은 민족이 사는 고국땅이니 낯설고 물설다 한들 이겨내지 못하랴 싶었다.

▼‘조선족 동포’가 죄인가 ▼

길림댁의 첫 일자리는 어느 식당의 주방일이었다. 그러나 먹고 잘 수 있는 일터를 잡았다는 안도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길림댁은 자신이 힘없는 이방인 신세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고국도 한 핏줄도 아니었다. 주방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틈만 나면 의자에 걸터앉아 쉬거나 홀에 나가 고스톱을 치면서 온갖 허드렛일에 잔심부름까지 길림댁에게 떠넘겼다. 남의 설거지를 대신 하느라 길림댁이 씻어야 할 그릇들은 싱크대에 수북이 쌓여 있기 일쑤였다. 일은 남들의 두 배, 세 배를 하건만 길림댁의 월급은 다른 사람들이 받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 그런데도 식당주인은 걸핏하면 길림댁에게 ‘가난한 중국동포’를 들먹였다. ‘네 주제’를 알라는 것이었다. 길림댁은 분하고 슬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다.

법적 체류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한국에서 차별받고 서러움 당하면서 큰 돈도 벌지 못한 채 중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길림댁은 단속의 눈을 피해 신도시 건설현장의 함바식당으로 일터를 옮겼다. 월급도 전의 식당보다 많은 60만원이었다. 새벽 5시부터 밤 10시가 넘도록 일했다. 시도 때도 없는 인부들의 간식에다 야식까지 대다보면 끼니도 제때 찾아먹기 힘든 고된 하루하루였다. 몸이 고단한 거야 견딜 수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조선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 하는 모욕과 천대였다. 그러나 불법체류자 처지인 길림댁은 제대로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 흘릴 뿐.

불법체류의 불안에 시달리던 길림댁은 망설임 끝에 한국남자와 재혼해 한국에 정착하기로 했다. 오래전 돌아간 전남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길림댁은 여전히 ‘조선족 여자’일 뿐이었다. 새 남편은 종종 길림댁을 파출부 대하듯 했다. 이웃여자들도 까닭없이 길림댁을 무시했으며 때로는 노골적으로 손가락질까지 해댔다. 길림댁은 좀처럼 ‘한국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올해 월간 ‘신동아’ 논픽션 공모 최우수당선작인 김진분씨의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 싶다’(11월호 게재)의 줄거리다. 김씨는 지금도 쉽지 않은 한국생활을 꾸려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등나무처럼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모습▼

‘신동아’ 논픽션 심사에 참여했던 필자는 김씨의 체험기를 읽으며 몇 차례나 얼굴을 붉혀야 했다. 아무리 ‘살이 살을 먹고 쇠가 쇠를 먹는다’고 하지만 이는 지난 날 우리가 미국과 유럽 등 부자나라에서 당해온 ‘가난한 설움’을 힘없는 재외동포, 아시아 빈국에서 온 노동자들에게 앙갚음하는 꼴이 아닌가. 이런 오만과 무례, 착취와 핍박, 편협한 배타주의와 용렬한 우월주의는 아직은 너무도 성숙하지 못한 우리 사회,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길림댁이 흘려야 했던 눈물, 한 맺힌 외국인노동자의 가슴을 생각하자. 그리고 부끄러워 하자. 깊은 가을날, 우리네 삶의 모습을 한번쯤 떠올려보자.

“…이제 초라히 부서져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나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김정환시인의 ‘가을에’중에서-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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