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윈의학, 질병 보는 새로운 눈 열어

  • 입력 2000년 10월 11일 19시 17분


우리 몸은 수많은 세균의 공격에 대비해 설계된 정교한 기계이다. 면역계가 바로 이 기능을 한다. 하지만 선진국이 될수록 위생 상태가 좋아져 면역계가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다보니 면역계는 사소한 이물질의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한다.

알레르기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종의 ‘선진국병’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위생상태가 좋은 선진국일수록 알레르기를 호소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다. 어릴 때 흙놀이를 많이 한 아이가 알레르기가 적다는 보고도 있다.

알레르기의 사례처럼 인간의 질병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다윈의학자들이 나타나 이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뜨겁게 일고 있다.

다윈의학은 현대병의 대부분이 빠르게 변하는 환경을 따라잡지 못해 일어난다. 진화의 시계는 느리기 때문에 우리 몸은 여전히 수십만 년 전의 환경에 적응돼 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너무나 급격하게 자신들의 환경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다윈의학은 1980년대 후반 정신과 의사 랜덜프 네스와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조지 윌리엄즈가 창안한 새로운 의학의 패러다임. 이들은 질병의 증상을 없애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현대의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질병에 걸리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을 인류의 진화 과정과 인체의 구조적 특성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디스크를 비롯한 각종 요통이 대표적인 사례. 의자에 몇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은 석기시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당시 사람들은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놀려야만 했다. 우리의 척추와 허리근육은 오늘날의 엄청난 하중을 견디게 설계돼 있지 않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이들을 의자가 아니라 바닥에 쭈그려 앉게 하고 자주 뛰어 놀게 하자는 프로그램도 나왔다.

우리는 설탕이나 기름기가 들어간 음식을 맛있어 한다. 이 음식이 굶주림이 일상적이던 시절, 인간의 생존에 결정적이었던 효율적인 영양소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굶주림에서 해방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 몸은 이런 영양소들을 갑자기 과잉 섭취하게 되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다. 비만, 심장질환, 당뇨병 등이 속출하는 이유이다.

급증하고 있는 정신질환도 마찬가지. 인간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탁 트인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던 석기시대의 환경에 맞게 돼 있기 때문에 과밀하고 복잡한 도시생활을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가 바람을 쐬면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윈의학이 나온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의학계에 도입되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기존 의학계의 이해부족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다윈의학을 국내에 활발히 소개하고 있는 서울대 최재천 교수(생명과학부)는 “의예과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 왔는데 이들이 본과에 들어가서 다윈의학 독서모임을 만들었다”며 “이들이 의사로 활동할 때쯤 다윈의학이 주류 의학 영역에 본격적으로 스며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이한 것은 오히려 한의학계에서 다윈의학에 관심이 높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한의사들로부터 공동연구를 하자는 제의를 종종 받는다”며 “인체를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적 사고에 숙명론적인 색채가 짙은 다윈의 사상이 낯설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강석기동아사이언스기자>alchimist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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