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정의와 비리의 사이

  • 입력 2000년 9월 28일 18시 56분


보통사람이라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선행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경우가 있다. 오갈 데 없는 불우한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돌봐주는 경우다.

우리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자식이 없는 노인들,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어린이들, 길거리를 헤매는 부랑자들을 모아 자기 식구처럼 돌보는 사람들이다. 평생 모은 돈을 불우이웃을 위해 내놓는 사람도 많다.

방송이나 신문에 이들의 얘기가 나오면 왠지 미안해지고 콧등이 찡해진다.

하지만 이같은 감격이 어느 순간 무너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선행을 가장한 것으로 드러났을 때다.

몇년 전의 일이다. 한 복지시설의 원장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비닐하우스 8개동에서 갈 곳 없는 어린이 노인 등 200여명을 돌봤다. 어느날 TV에 출연해 “닷새면 쌀 한가마니가 동나는 등 넉넉지 못한 살림으로 생활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여러 곳에서 후원금이 쏟아졌다. 많을 때는 한달에 4억원이 넘었다.

그러나 뒤에 밝혀진 그의 행적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100억원이 넘는 후원금을 가로채왔으며 이 돈을 갖고 외국으로 달아났다. 알고 보니 그는 절도 등 전과 8범이었다.

요즘에도 우리사회에는 ‘두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공직을 그만두고 맡은 단체의 이익을 위해 할복(割腹)을 시도했던 한 인사가 있었다. 그는 공직시절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한 시장이 뒤에 부정축재자로 밝혀진 일도 있다. 정부 고위직에 있다가 뇌물 받은 것이 드러나 자리를 물러난 인사도 한두명이 아니다. 선거 때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고도 당선된 후에는 누구보다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말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누구보다 시민운동에 열심이었던 한 인사의 도덕적인 타락이 드러나기도 했다.

정의의 사자로 알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비리투성이의 인사로 추락했을 때 사람들은 지금까지 가짜 이미지에 속아온 데 대한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번 신용보증기금 사건에서도 한 인사를 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사건의 본질이 대출외압부분이어서 수사는 좀더 지켜봐야 하지만 그의 개인비리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검찰에 가기 전 그는 비리와 관련해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의 경험으로는 뭔가 떳떳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겉으로는 누구보다 정의감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남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 정신의 이중구조다. 진짜 정의파가 자신의 선행을 숨기려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작용이다. 사회적 도덕적으로 못된 짓을 했을 때 심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의파로 돌변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 고통 갈등 등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정신과의사 정혜신씨)

도망 다니며 이따금 선행을 베푼 탈주범 신창원도 마찬가지다. 그는 ‘남들은 모르지만 나에게도 이렇게 괜찮은 면이 있다’고 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정의와 비리의 사이는 얼마나 먼가.

송영언<이슈부장>younge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