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엄마의 와우! 유럽체험]하이디의 장바구니

  • 입력 2000년 9월 22일 14시 49분


▲취리히 전경
▲취리히 전경
목감기와 멀미로 보채는 아이를 이고지고 12시간 비행해서 도착한 취리히. 졸음과 피로로 게슴츠레한 눈에도 하이디의 고향 스위스의 첫인상은 매혹적이었습니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뚝딱 달력하나 만들 수 있을 정도니까요.

우리가 지낼 아파트는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잠시 떠난 아가씨 집. 지붕 밑의 아담한 스튜디오인데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5층까지 짐을 올리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짐을 보더니만 택시운전사는 허리 수술을 했다면서 꽁무니를 빼더라니까요.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다는 말에 겁이 나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모조리 싸왔는데 좀 심했나 봅니다.

짐 속에 넣어온 전기밥솥이랑 한국쌀을 꺼내는데, 문득 그리운 엄마 얼굴이...밥까지는 좋았는데 반찬거리라고는 한국에서 가져온 마른 멸치와 고추장 뿐. 급한 대로 먹을 거리를 찾으러 나섰죠.

아, 하늘이시여. 이 슈퍼마켓이라는 것이 전차를 타고 다섯 정거장 나가야 있다는군요. 취리히의 슈퍼마켓은 보통 아침 7시에서 저녁 7시까지 열고 목요일 하루만 8시까지 문을 연데요. 늦은 밤이나 일요일에는 중앙역에 있는 슈퍼마켓으로까지 가야 하는 거 있죠. 아기 우유 사러 서울역을 찾아야 한다면 모든 한국인이 웃을 일이 아닐까 합니다만. 어쨌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으니까 슈퍼 문 닫기 전 부지런히 먹을 거리를 골라보기로 했습니다.

취리히에서 가장 크다는 '미그로스' 슈퍼마켓의 진열대를 살피는 순간, 반갑게 눈에 안기는 글씨 신라면! 그러고 보니 아시아 식품 코너에는 간장, 소면, 유부, 김, 젓가락, 고춧가루, 길쭉하고 가느다란 동양 쌀이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김치라면, 짬뽕라면 등은 취리히 사람들이 즐겨 먹습니다. 진열대에 수북히 쌓여 있는 걸 보면 그걸 금새 알 수 있죠. 그런데 그 매운 신라면을 이 사람들이 어찌 먹을까 궁금하시죠? 유럽으로 수출되는 수프에는 매운 기가 없어, 매울 신이 아니라 새로울 신라면이랍니다.

고추장을 풀어 야채랑 소시지 넣고 보글보글 끓이고 라면사리 추가하면 대강 부대찌게 비슷하게 되지 않을까요? 소시지는 종류가 100가지는 족히 되어 보입니다. 소시지 공부는 앞으로 시간이 많을 테니 미루고 한국 것과 제일 비슷한 길쭉한 놈으로 고르겠습니다. 여기에 호박, 양파, 참치 캔, 파, 감자, 우유, 아침에 먹을 빵, 치즈, 요구르트, 쓰레기 봉투 등을 사서 카운터를 통과한 순간, 끼약! 계산서는 무려 우리 돈으로 4만원이 나왔습니다. 쓰레기 봉투가 무려 만6천원이나 하다니, 내용물보다 봉투가 더 비싼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바구니 물가를 실감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전차를 기다리는데 노천 카페 메뉴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격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한화로 표시하겠습니다). 소시지와 감자튀김 한 접시에 만5천원. 코카콜라 작은 것 한 병에 2천4백원. 베이글 하나에 4천원. 소프트 아이스크림 작은 것이 4천원...

▲ 공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

▲ 취리히 시내 빵집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면 서비스료가 붙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문한 음식을 주섬주섬 봉투에 담아들고 공원 벤치나 잔디밭에 앉습니다. 스위스는 외식비가 비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집에서 요리를 즐긴다더니만...

절제가 몸에 밴 식습관 때문인지, 높은 물가 때문에 제대로 못 먹은 것인지, 하나 같이 호리호리한 취리히 시민들. 우리도 그들처럼 자연스레 다이어트에 합류하게 되리라는 예감입니다.

오늘 배운 인사 한마디는 그뤼에찌(Gruezi). 슈퍼 주인이 인사하는 걸 못 알아듣고, "뭐라구요?"를 연발하는 나를 보다 못해, 뒤에 있던 할머니가 "스위스 헬로우라우"라고 알려줬습니다.

침대에 누워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정말 유럽 한가운데 떨어지긴 떨어졌나봅니다. 시차 때문에 잠은 오지 않고 멀뚱멀뚱. 내일 할 일이나 생각해 두죠. 전화 신청하기, 관광청에 들러 취리히 지도랑 정보 구하기, 전입신고하기, 남편의 출근준비...그건 그렇고, 고민입니다. 차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김지민 nowya200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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