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테이프' 있다면 공개하라

  • 입력 2000년 9월 21일 19시 17분


박지원(朴智元)전문화관광부장관이 20일 장관직 사임 기자회견에서 밝힌 ‘한나라당 대선자금 관련 테이프’의 실체 여부는 하루라도 빨리 규명되어야 한다. ‘테이프 의혹’이 그러잖아도 수렁에 빠져 있는 정치권의 또 다른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선 테이프의 존재를 내비친 여권이 먼저 그 사실 여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문제를 푸는 순서다. 박전장관은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의 대선자금 관련 테이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이총재의 자료 테이프는 지금 그런 말을 할 장소도 아니고 자료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박씨의 답변은 누가 들어도 그런 테이프가 여권의 어느 구석에 보관되어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여기에다 민주당의 김옥두(金玉斗)사무총장은 “테이프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박씨의 발언을 뒷받침했고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함구령까지 내려졌다는 얘기다.

여권이 이처럼 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슬쩍 흘리면서도 떳떳하게 그 실체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이 테이프는 여권이 2002년 대선 등 좀더 결정적인 순간에 한나라당을 공격하려는 비장의 무기로 사용하려 한다”는 등의 의혹과 소문이 꼬리를 문다. 테이프에 수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들이 흘러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박씨가 문화부장관의 위치에서, 그것도 사석이 아닌 공식적인 기자회견에서 그같은 테이프 얘기를 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사퇴를 줄기차게 주장한 한나라당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의 발로인지, 아니면 장외로 나간 한나라당을 우회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더 큰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주 민감한 주제의 얘기를 아무런 증거 제시도 없이 불쑥 던지는 자세는 무책임하다. 만약 그런 테이프가 있다면,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비리나 부정에 관한 것이라면 수사기관에 제출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범죄행위를 따지는 것이 순리다.

이회창총재도 “테이프가 있다면 제발 내놓아라”고 말하고 있다. 기왕에 여권측에서 먼저 불씨를 댕긴 얘기이니 여권이 앞장서 정상적인 절차와 과정을 밟아 사실을 규명하기 바란다.

이대로 그냥 덮어두고 또 슬쩍 넘어간다면 의혹은 의혹대로 부풀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가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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