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예종석/정부는 공기업부터 개혁하라

  • 입력 2000년 9월 19일 18시 44분


분통이 터진다. 감사원이 발표한 141개 공기업에 대한 특별감사 결과를 보면 이렇게 국민을 우롱할 수도 있나 싶어 탄식이 절로 나온다. 어느 은행장은 자신의 취임을 반대하는 노조를 무마하기 위해 162억원의 특별보조금을 지급했다고 하고 모 공기업은 노사화합을 도모한답시고 전 노조원을 1호봉씩 특별 승급시켜 227억원의 부담을 떠안았다고 한다.

일도 하지 않는 유휴인력에 월급을 주고 있는 공기업도 있고 매출액이 생산원가에도 턱없이 못미치는 기업이나, 산업 자체가 사양화돼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기업도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 산더미 같은 적자속에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공기업에는 6100만원의 연봉을 받는 운전기사도 있고, 30년 근무한 직원에게 5억원 가까운 퇴직금을 지급한 기업도 있다.

국민의 혈세를 잘도 나눠먹었다는 말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주인 없는 회사 라는 의식이 이런 방만한 경영의 원인이라지만 공기업에는 국민이라는 주인이 엄연히 있다. 정부는 그 국민의 기업을 위탁받아 경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공기업의 경영을 관리, 감독해야 할 정부가 그 소임을 게을리한 결과다.

공기업은 정부의 지시도 한 귀로 흘렸다. 정부는 98년 12월까지 퇴직금 누진제를 폐지하도록 지시한 바 있지만 무려 40개 공기업이 아예 이행하지 않았다. 20개 기관은 누진제를 정부 기준일보다 늦게 폐지해 6800억원이나 되는 퇴직금을 추가 부담했다고 한다. 누진제를 폐지한 기관들도 복리후생비를 인상하거나 사내복지기금 출연 등의 편법을 동원해 퇴직금 감소분을 보전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정부의 인원삭감 지시에 허위보고를 한 기관도 있다고 한다. 공기업 경영에 관한 한 우리 국민은 가히 무정부 상태에 있어온 셈이다. 정부는 이번 일을 깊이 반성하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김대중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기업 노동 금융 공공 등 4대 부문에 대한 개혁을 줄기차게 주창해왔다. 아직 개혁의 결과를 평가할 시기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이 시점에 공공부문의 개혁이 이 지경이라면 국민은 정부의 개혁의지와 국가경영 능력에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제 머리도 못깎는 정부의 개혁 실천을 누가 믿겠는가 말이다. 정부가 경영하는 공기업이 개혁에 역행하고 있는데 누구에게 개혁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실태가 감사원에 의해서 지적되는 것을 보면서 정부의 감독부서는 그 동안 뭘 하고 있었느냐고 국민은 묻고 싶다.

공기업의 부실 경영문제는 정부에 큰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김대중 정권의 성공여부와 맞물려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정부는 우선 방만한 경영의 1차적 책임을 경영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동시에 정부는 공기업 경영을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는 해당 부처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책임추궁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은 인사권자의 결단에 달려 있다. 이제 공기업은 낙하산 인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공기업이 더 이상 정치권의 인사숨통이나 트는 곳이 돼서는 결코 안된다. 정부는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의 원인을 강성노조와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로 돌리고 있으나 오히려 잘못된 낙하산 인사가 노조를 강성으로 만들고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합리적 인사가 이뤄지지 않는 기업에 합리적 경영이 있을 수 없다. 이제는 우리 공기업에도 경영능력을 갖추고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소신껏 개혁 의지를 펼 수 있는 경영자가 필요하다. 그러한 경영자는 그 동안 시간만 끌어 온 민영화를 신속하게 추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영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정부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는 기왕에 시작한 일들을 마무리 해야 한다. 경제위기가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 시점, 공공부문의 개혁은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정부가 스스로의 개혁조차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에 미래는 없다. 국민은 지금 정부의 조처를 주시하고 있다.

예종석(한양대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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