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수단]남북선수들 당구즐기며 정겨운 농담

입력 2000-09-15 20:09수정 2009-09-22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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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체조영웅 배길수가 쓴 '조국통일의 그날을 하루빨리 당기기 위하여'
북한의 레슬링 선수와 남한의 복싱 선수가 두 명씩 짝을 지어 맞붙는다면? 아마도 심각한 부상이 예상되는 ‘유혈사태’를 상상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상황이 생겼다. 그러나 이 기묘한 결투는 ‘웃음 꽃’으로 막을 내렸다. 이 대결이 이루어진 장소는 시드니 올림픽 선수촌, 올림픽 종목과는 관계없는 당구로 치러진 한 판 승부였다.

전 세계에서 모인 1만6000여명의 선수단이 함께 생활하는 올림픽 선수촌. 경쟁을 떠나 우정을 나누는 화합의 장소다. 특히, 선수촌의 ‘국제지역(international zone)’은 선수들에게는 휴게실 같은 곳. 각종 상점을 비롯, 인터넷이 가능한 PC와 전자오락실 당구장 등 레크리에이션 시설이 갖춰져 있는 이 지역은 취재진에게도 부분적으로 개방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본지 취재팀이 선수촌 국제지역에 들어간 14일 오후 ‘운좋게도’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북한의 ‘체조스타’ 배길수와 레슬링 선수 리영삼(자유형 58kg급), 진주동(자유형 54kg급), 강영균(그레코로만형 54kg급)등 ‘인민 체육인’ 4명은 이 지역에서 당구를 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 이 곳을 들른 한국 복싱 대표 김태규(플라이급) 최기수(라이트헤비급)가 “한 게임 하자”며 진주동―강영균 조에 도전장을 냈다. 북한 선수들은 “무슨 종목에 출전하는 선수들이냐”며 묻고는 흔쾌히 응했고 당구 규칙에 대해 잠시 논의를 한 뒤 ‘남쪽 식’을 따르기로 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최기수가 북쪽 선수들의 당구 실력을 두고 “운동은 안 하고 당구만 친 모양”이라고 농담을 건네자 웃음으로 받았던 진주동은 남쪽 선수인 김태규가 좀처럼 큐를 건네지 않고 계속 성공시키자 “운동 안하고 당구치기는 그 쪽도 마찬가지”라고 응수했다.

평양(강영균)과 개성(진주동)이 고향인 북측 젊은이와 진주(최기수)와 홍성(김태규) 출신의 남측 젊은이들이 서로 자기 고장의 사투리를 섞어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어색하기 보다는 훈훈한 장면이었다.

게임에서 이긴 강영균은 “조국에 있을 때는 여가로 주로 당구를 하곤 했지요”라며 멋적은 웃음을 흘렸다. 남쪽 선수 최기수는 “시드니에 와서 북한 선수들과 어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선수촌에서 만나는 북쪽 선수들에게는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게임을 즐기는 동안 다른 테이블에서는 배길수와 리영삼이 외국 선수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준급의 당구 실력을 발휘하며 상대였던 카메룬 선수를 쉽게 따돌린 배길수는 “훈련은 하루에 3시간만, 그저 놀면서 하지요. 시합이 곧 오잖아요”라며 “틈이 있으면 이곳에 나와 ‘놀음삼아’ 당구를 친다”고 말했다.

은퇴 후 3년간의 공백을 딛고 올림픽에 출전한 이유에 대해서는 “새 천년 첫 올림픽인데 나와서 메달을 따야지요.”라고 했다가 “이주형이 동생 장형이도 잘 하는데…. 놀다가 나와서 메달 자신 없는데.”라고 슬쩍 넘기기도 했다. 기자가 남북 동시 입장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저 좋지요.”라고 짤막하게 답한 뒤 “그래도 통일을 빨리 만들어야지”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결혼한 배길수는 8개월 된 딸(수옥)을 두고 있다. 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보고 싶기는 하지만 뭐 여기에서….”라고 말을 흐렸고, 옆에 서 있던 리영삼은 “형수님이 대단한 미인”이라고 참견을 했다.

북한에서는 누가 메달을 딸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배길수는 “종목이 틀리면 잘 모릅니다. 계순희가 곧 잘 하고, 리성희도 잘 합니다. 우리는 ‘력기’라고 하는데 남쪽에서는 역도라고 하던가요. 여자 역도의 리성희도 잘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이 세번째 올림픽 출전인 배길수는 “선수촌이 괜찮고 지낼 만 한데 밤에는 좀 춥다. 남쪽 선수들 숙소와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것 같다. 우리 윤성범 단장은 매일 선수들을 찾아와 격려해 준다.”며 선수촌 생활을 전했다.

늦은 오후에 국제지역을 찾은 북한 선수들은 ‘개막 전날의 휴식’을 만끽하느라 어스름이 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성원기자>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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