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투자 개미열전]"이제 가정으로 돌아오세요"

  • 입력 2000년 9월 3일 18시 23분


사랑하는 당신께.

지금 막 당신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서재로 들어와 PC를 켰습니다. 몇 번을 주저하다가 서로간의 불신과 냉소를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어렵게 몇 자 적어봅니다. 당신이 매일 밤 들르던 이 곳 팍스넷에 글을 올려놓으면 당신이 보실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몇 달 전부터인가 당신은 서재에 계실 때 제가 드나드는 것을 싫어하셨죠. 처음에는 중요한 일을 하시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서재에 계실 때는 TV 소리조차 방해가 될까봐 아이 방에서 아이와 함께 놀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이가 기침을 하기에 구급약을 찾으러 무심코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당신은 제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PC 모니터만 응시하고 계셨죠. 등 너머로 보이는 화면 속에는 어지러운 그래프들이 그려져 있었고, 저를 보고 당황해하는 당신의 눈빛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쳤습니다.

다음날 당신의 책상 서랍 깊숙이 보관된 마이너스 예금통장들과 퇴직금 중간 정산 영수증을 발견했을 때의 허탈함이란…. 그런 것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당신의 미련스러움과 남편의 책상을 기어코 훔쳐보고야 만 정숙하지 못한 저 자신을 탓하고 싶을 만큼 충격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갖은 원망을 해대며 ‘완벽한 내 남편’과 ‘훌륭한 우리 아빠’의 자리에서 당신을 끌어내렸죠. 그때부터 침묵으로 돌아서버린 당신은 당신만의 서재 속으로 더 깊숙이 파묻혀 버렸습니다.

그토록 완벽했던 당신을 무너뜨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결코 돈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흘러가는 시간들이 주는 압박, 그리고 또 있다면 저와 아이가 당신을 외롭게 내버려둔 때문이겠죠. 그런 것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주식이라는 휴가처를 찾게 했나 봅니다.

당신은 분명 주식의 도박성과 중독성은 당신의 의지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아이가 당신을 대할 때 점점 웃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일곱살짜리인 딸아이가 무슨 느낌이 들었는지 아빠랑 헤어져 살면 엄마하고도 안 산다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아이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다짐을 했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아빠의 다정다감했던 옛 모습을 꼭 찾아 주겠다고.

당신,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당신이 얼마나 손실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을 당신이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재충전돼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쓴 휴가비용이라고 생각하렵니다. 그리고 이제 긴 휴식을 끝내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당신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내일은 오랜만에 당신이 좋아하는 산채로 가득한 저녁상을 준비할 생각을 하니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추신:앞으로는 당신 혼자만의 외로운 휴가는 절대로 보내지 않을 겁니다.

<반병희기자>bbhe424@donga.com―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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