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읽기]신윤복 '월하정인도'

  • 입력 2000년 8월 29일 18시 28분


초승달 지는 깊은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 무슨 일일까? 다소곳하게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은 수줍음 반 교태 반 야릇한 정이 볼에 물들었다.

저고리 깃과 끝동의 보랏빛이 옥색 치마 아래 진자줏빛 신발과 어울리고, 치마와 동색인 한층 연한 쓰개치마 맵시가 곱기도 하다. 그윽한 눈길을 건네는 사내는 오른손에 초롱 들고 왼손으로 허리춤을 뒤적인다. 애틋한 정표라도 전하자는 것일까? 도포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긴 갓끈은 멋들어지게 어깨에 걸쳤는데 마음은 진작부터 초롱불 속처럼 뜨듯해서 발끝이 벌써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내로라 하는 장안의 한량인 사내의 가죽신은 코와 뒤축에 따로 옥색을 댄 호사스런 것이다. 여인은 치마를 묶어 올려 하얀 속곳이 오이씨 같은 버선 위로 드러났다. 아마도 함께 갈 낌새지만 안 그럴지도 행여 알 수 없다. 달빛이 몽롱해지면서 두 사람의 연정도 어스름하게 녹아든다.

배경이 뽀얗게 눅여져 있으니 섬세한 필선과 화사한 채색으로 그려진 두 연인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신윤복은 이 정황을 풍류 넘치는 흐드러진 필치로 이렇게 적었다. ‘달도 기운 야삼경/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月沈沈 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화제(畵題)도 기막히지만 글씨 주위와 옆 건물 벽을 반쯤 여백으로 처리한 솜씨가 쏠쏠하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옛말에 ‘늙어 기첩(妓妾)을 두면 반드시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승을 지낸 김명원이 젊어서 화류계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만 사랑하는 기생이 권문세가의 첩이 되고 말았다. 그녀를 잊지 못한 명원이 어느 날 밤 담을 넘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크게 경을 치게 되었다. 때마침 형 경원이 급히 달려와 소리를 쳤다. “내 아우가 기운이 호탕하고 몸가짐은 거칠어 공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우는 평소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뒷날 크게 쓰일 인물입니다. 공께서는 아녀자 일로 나라의 인재를 정녕 죽이시렵니까?” 그러자 주인은 결박을 풀고 후히 술을 대접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데 김명원을 끌어댄 것은, 화제로 쓴 시구가 들어 있는 한시를 그가 지었기 때문이다.

‘창 밖은 야삼경 보슬비 내리는데/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리라/나눈 정 미흡해서 날 먼저 새려 하니/나삼(羅衫) 자락 부여잡고 뒷기약만 묻네’(窓外三更細雨時 兩人心事兩人知 歡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問後期). 예나 지금이나 남녀간의 일은 갈피도 많고 두서는 없으며 반드시 은밀하게 마련이다. 신윤복은 그러한 남녀간의 정을 주제로 한 그림의 명수였다.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소설 한 편보다 더 소상하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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