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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8월 24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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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인은 불만이었다. 그가 온갖 정성을 들여 가꾼 꽃밭이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소방관이 불을 끄느라 꽃밭을 짓밟아 놓은 것이다.”
요즘 금융계에서 떠도는 이른바 ‘꽃밭 이론’이다. 외환위기로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놓였을 때, 외국자본이 들어와 살려놨더니 이제 꽃밭을 망가뜨렸다고 불만이라는 얘기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꽃밭은 미국 뉴브리지캐피털이 인수한 제일은행이요, 꽃밭 주인은 한국이고 소방관은 외국자본이다. 한마디로 나라 전체를 살렸으니 그런 ‘은인’들에게 제일은행을 선물로 줬다고 치면 괜찮지 않으냐는 뜻이다.
그런 제일은행을 사들인 뉴브리지에 우리 정부는 무려 3조5000억원을 더 주기로 했다. 이미 이 은행을 살리기 위해 10조원 이상의 돈을 퍼부었다. 더군다나 앞으로도 1, 2년간 추가로 돈을 더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국민의 주머니 돈인 공적자금이다. 다른 은행들은 제일은행이 부럽다. 그런 조건으로 경영을 한다면 누군들 못하겠느냐고 비아냥거릴 만도 하다. 서울은행에선 1조5000억원만 있으면 부실을 완전히 떨어버릴 수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일은행 경영진이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 빠진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일은행 같은 세금 잡아먹는 ‘블랙홀’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는 데 있다. 부도날 기업을 워크아웃 기업이란 요상한 말로 살려줬더니 제일은행 뺨치더라는 얘기다. 부도가 날 정도로 어려운 기업에서 기업주가 돈을 빼다 쓴 일이 드러난 것이다. 정부가 뒤늦게 세무조사를 의뢰했다고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들을 상대로 세무조사를 벌인다고 해서 국민의 혈세가 돌아올 리도 없다.
그러나 워크아웃 기업인들만이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야 할까. 이들을 당장 쫓아내 경제계에서 발을 못 붙이게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까. 그렇지 않다. 이들 기업인을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범죄행위를 감시하고 막아야할 기관과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워크아웃 기업을 감시하는 일은 채권은행들의 몫이다.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거액을 빌려주고도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다면 공범이나 다름없다. 채권은행들이 워크아웃 기업에 보낸 경영관리단은 왜 철저히 감시하지 못했나. 관치금융시대처럼 정치권에서 봐주라고 했던 것인가.
현대건설의 자구노력과정에서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보여준 행태도 별로 다를 바 없다. 돈을 빌려준 은행보다 남의 돈을 많이 빌려쓴 채무자가 더 큰소리를 치는 형국이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꼴이다. 정주영씨의 현대자동차 지분 6.1%를 매각하는 과정에서도 은행측은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현대건설의 자금난이 심각하다면 채권은행은 왜 나머지 3%의 주식마저 팔라고 요청하지 않는가.
국민의 돈을 함부로 굴리는 은행이나, 그런 은행을 철저히 감독하지 않는 금융감독당국은 스스로 모럴 해저드에 빠지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박영균기자<금융부장>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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