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미래를 좀먹는 거짓말 정치

  • 입력 2000년 8월 15일 19시 12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속편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제목이 재미있다. 원래 제목에 ‘아직도’(still)라는 부사가 덧붙여져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아직도 알고 있다’가 되었다.

그렇다. 과거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폴 부르제의 소설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뒤따른다’가 말해주듯이 내가 한 과거의 일은 그대로 현재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미래에까지 연결된다. 그것은 영광의 훈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회한의 멍에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인생살이에서 매사에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美선 과거 잘못 철저히 추궁▼

지금 미국에서는 ‘과거와의 싸움’이 한창이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조지 W 부시는 철없던 20대 후반에 술과 마약을 가까이 한 전력 때문에 두고두고 고생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인 고어는 지난 8년 동안 클린턴대통령의 그늘에 안주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과거 때문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조지프 리버맨은 클린턴의 비도덕성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최초의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다는 과거의 전과(戰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자유니, 다원주의니, 포스트모던이니 하여 어지러워 보이지만 한두 가지 기본적인 도덕률에 관한 한 미국 사회는 철통같다. 사람이 실수를 하지 않고 살 도리는 없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말을 바꾸는 자는 치사한 사람이다. 정치하는 사람의 경우 이 원칙은 더욱 가혹하게 적용된다. 백악관에서 할 짓 못할 짓 다해도 모르는 척 눈감아 주지만, 거짓말하는 대통령은 가차없이 쫓아내 버리는 것이 미국이다.

이를 위해 언론이 집요하게 과거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 뉴욕타임스지는 이미 10여 차례에 걸쳐 전면을 할애해 가며 부시의 과거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가 젊은 시절에 과연 마약에 손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30년 전 여자 친구 여러 명의 인터뷰가 생생하게 지면에 오르내린다. 결국 부시는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재확인함으로써 미국의 정체성이 생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힘이 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 어느 곳보다도 지조와 절개가 중시되고 그 무엇보다도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의 덕목이 강조되던 곳이 바로 우리 사회였다. 그러나 이제 어떻게 된 세상인지 변절과 굴신(屈身), 그리고 거짓말과 말 뒤집기가 출세의 지름길이 되고 있다.

언론마저 이 잘못된 정치풍토를 쇄신하는 데 앞장서기보다는 오히려 왜곡된 역사를 확대 증폭시키고 있다는 혐의를 받기에 이르렀다. 우리 사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1997년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세불리(勢不利)하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은 정권이 바뀌자 스스럼없이 권력의 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방치말고 끝까지 응징해야▼

도둑질도 짝이 있어야 한다던가. 불행하게도 그 일 이후 우리 정치판에는 거짓말 시리즈가 줄을 잇고 있다. 내각제 개헌 약속은 보아란 듯이 휴지통에 던져졌고, 여권과의 공조를 둘러싼 자민련의 아찔한 활공비행은 지금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을 속이고, 마침내는 자신을 속이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자들이 정치를 한다며 돌아다닌다.

그래서 새천년민주당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걱정이 된다. 또 다시 경선에서 졌다고 판을 뒤엎고 나가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아무리 말을 뒤집고 거짓말을 해도 역사는 자기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졸장부들의 행진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행위는 끝내 우리의 뒤를 따르고 만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란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이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산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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