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싸늘한 소떼 방북

  • 입력 2000년 8월 8일 18시 29분


현대의 소떼 방북은 분단 이후 최대의 통일 이벤트였다. 98년 6월 500마리의 소가 남북의 군사력이 집중된 휴전선을 유유히 넘어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출발 인사말은 환송나온 실향민들의 눈물샘을 건드리는 '센티멘털 저니'였다. "강원도 통천에서 아버님의 소 판돈 70원을 훔쳐 가출했습니다. 이제 한 마리 소가 천 마리 소가 되어 빚을 갚으러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그레이트 저니'이기도 했다.

▷현대의 소떼 방북단이 세 번째로 판문점을 넘어 북한 땅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첫 번째와 딴판으로 싸늘하게 식었다. 출발 인사말도 없고 곱지않은 여론을 의식해 환송행사를 자제한 분위기가 뚜렸했다. 들끓는 국내 여론에도 묵묵부답으로 한달 이상 해외에 체류하다 입국 하루만에 방북하는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이번 여정에는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이 동행했다. '주군(主君)의 총명을 흐려놓는 가신(家臣)' 이라는 비난과 함께 퇴진 압력을 받는 전문경영인들이다.

▷정의장은 판문점에서도 현대사태에 관해 "말할 입장도 아니고 할 말도 없다"는 녹음기를 틀었다. 현대그룹 회장을 내놓고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에만 전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태에 관해 말할 입장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통천에서 소 판 돈을 들고나와 현대그룹을 일으킨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번 방북 길에 동행하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은 것같다. 형제들 간에는 감정의 고랑이 깊게 패여 현대그룹 전체의 의사가 결집된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막판에 현대를 강성으로 몰아붙이던 경제팀은 이번 개각에서 물러났다. 재경부장관과 금감위원장이 거는 전화도 받지 않고 한달 이상 해외에 머무르다 들어온 것을 보면 경제팀교체를 훤하게 내다봤던 것인가. 시중에는 현 정부가 대북사업 등 현대에 신세진 것이 많아 단호한 처리를 못하고 볼모로 잡혀 있다는 시선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현대의 운명에는 관심이 많을 테니 기왕 방북한 마당에 두루 조언을 듣고 돌아와 모쪼록 현명한 결단을 내려주기 바란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