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100년동안의 제자리 걸음

  • 입력 2000년 7월 28일 19시 24분


정보나 기술은 100여년 전에도 위력을 떨쳤다. 요즘 같은 눈부신 '벤처세상'이 아니더라도 개인에겐 돈이 되고 국가엔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미국의 에디슨 같은 발명가의 성공은 다 아는 일이다. 그는 자기의 발명, 남의 아이디어를 이용하고 아울러 막강한 부와 권위를 구축했다. 국가 역시 그런 기술 과학에 앞서고 정보에 빠른 구미 나라들이 동양을 거머쥔 역사는 새삼 되풀이 할 것조차 없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같은 동양이라도 그나마 일본이 덜 당했다. 그런 경쟁력을 알 수 있는 실마리는 이런 것이 아닐까. 1899년 영국에 머물던 일본군인이 정부에 정보로 보고한 것이다.

'마르코니의 무선전신이 나온 지 4년여, 그 성능이 양호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식자들은 근래에 드문 대 발명이며 미래에 큰 편익이 될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즉각 군용으로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해상 통신에 이점이 많고 적군 동정이나 우군의 정보 명령 전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신학자나 해군이 연구 개발에 나서야 한다.'

통신거리의 개념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은 무선통신 혁명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린 것이다. 1년 뒤 미국에 파견된 한 일본 장교는 “지금 영국에서 개량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무선통신은 장래 크게 활용될 것이므로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에서 무선통신 설비권을 획득해 놓아야 한다”고 일본 정부에 건의했다.

정보 기술은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일본은 무선전신 기술을 해군 통신에 이용하기 위해 돈을 들여 연구진을 가동했다. 그리고 2년 만에 해상 34㎞까지 소통이 가능한 무전기를 만들어 이것을 해군의 공식 병기로 채택한다. 세계를 경악케 한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에는 이런 조기경보 및 전파방해 능력을 갖춘 일제 무전기도 한몫 했던 것이다.

그 무렵 전후해서 이 땅에서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서정욱(徐廷旭·현 과학기술부장관)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전기통신'의 실체를 처음 접한 사람은 일본에 외교사절로 간 김기수(金綺秀)였다. 그는 일동기유(日東記游)라는 기록에 그 놀랍고도 '믿어지지 않는 기술'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정작 고종에게 올린 복명서에는 전신에 대해 한 자도 적지 않았다. 원리설명이 어려워 빼버렸거나 정치싸움으로 날이 새고 지는 판에 소개해 봤자 무슨 소용이랴 싶어서였을까?

당시 신사유람단의 기록에도 전신에 대해 찾아보면 '효용의 오묘' '기술의 현묘함' 같은 말로만 전하고 만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한말(韓末)의 그 많은 선각자 중에 누가 언제 어떻게 어떤 기술을 이어받고 개발해 국가안보에 기여하고 오늘날 우리의 과학 기술과 산업에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에 대한 자료를 아쉽게도 찾을 수 없다”고 서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탄식한다.

한말 고관과 양반들의 정보 기술 과학에 대한 자세가 눈에 선하다. 그렇게 해서 맞은 망국 식민지배 내전 분단의 100년 세월이 흘렀다.정부가 앞장서서 '지식정보사회'를 외치는 지금은 달라진 것일까. 국회에는 비례대표 직능대표 의원으로 연예 체육 군 여성계 인사는 적지 않지만 딱히 과학기술계 인사라고 할 이는 16대에도 단 한 명도 없다.

과학기술 정보통신분야 정부출연연구소의 일은 기업이 하는 연구개발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도 정치인은 그 특성을 간과한 채 '투자의 성과를 보여라'고 질책이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원칙한 구조조정을 되풀이한다는 불만이 높다. 정보통신 과학기술 부서에도 행정고시 출신이 기술고시 출신을 지배한다는 불평도 많다. 조정이나 정치꾼들이 기술관리 장영실(蔣英實)을 얕보던 식이다.

최근 국회 과학정보통신위원회가 '무(無)파행 선언'으로 눈길을 모았다. 여야의 당략충돌로 국회가 헛돌더라도 정보통신 과학기술 등은 소관업무가 빠르게 진보하고 발전하는 만큼 이 위원회만은 사시사철 정상 운영한다는 다짐이었다. 여기서는 본회의나 다른 상임위와 관계없이 월례 간담회를 꼭 열기로 했다. 날치기 소동에도 불구하고 “8월 모임은 9일로 잡혀있고 한나라당 위원도 참여한다”고 한나라당 박원홍(朴源弘)의원은 말한다. 의원들 자비로 실리콘밸리에 가서 견학을 겸한 간담회도 연다. '100년 동안의 제자리걸음'에서 성큼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인가.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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