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찜쪄먹기]H G 웰스 '타임머신'

  • 입력 2000년 7월 28일 13시 57분


《미래세계를 보여주는 타임머신. SF작가들은 이를 도입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얘기를 풀어가는 방법을 얻었다. 타임머신의 작가 웰스는 이 시간여행장치를 이용해 미래사회를 그려내면서 당시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줬다. 그가 그려낸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탐험해보자.》

◆미래인간 엘로이와 몰록

전기도 자동차도 보급되지 않은 19세기 후반의 영국 런던. 어느날 저녁 주인공은 친구들을 모아놓고 시간여행장치를 만들었다는 놀라운 발표를 한다. 그는 조그만 '타임머신'으로 직접 실험을 해보이지만 친구들은 일종의 마술 같은 트릭으로만 여길뿐, 진지하게 믿으려하지 않는다.

일주일 뒤에 다시 그들이 모였을때, 주인공은 갑자기 집안에서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나타나 더 놀라운 얘기를 전한다. 서기 802,701이라는 아득한 미래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는….

그가 처음 접한 미래인간은 더없이 아름답고 우아하며 양처럼 순하다. 스스로를 '엘로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오로지 먹고 놀기만 할뿐 일체의 생산활동이나 지적탐구에 흥미를 보이지않는다.

그들이 사는 도시도 오래전 그들 선조가 남긴 것이고 지속적인 보수나 유지의 흔적이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다. 엘로이들은 그저 선조의 유산안에서 글자 그대로 밥벌레나 다름없는 무위도식한 삶을 보내고 있다.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일이 생기자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엘로이들이 뭔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존재는 밤마다 나타나는 기괴한 눈동자들, 즉 '몰록'이라는 미래 지하인간이다. 엘로이의 도시 곳곳에는 수수께끼의 우물 같은 것이 있는데, 몰록은 바로 그 밑지하도시에서 오는 것이었다. 어느날 주인공은 몰록들에게 잡혀갈뻔한 위너라는 엘로이 여성을 구해주면서 그녀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밤마다 몰록의 기분 나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거듭되자 주인공은 굳은 마음을 먹고 우물 밑으로 내려간다. 처음으로 지하인간 몰록과 맞닥뜨린 그는 추한 몰골에 경악하고 그들에게 쫓기다가 간신히 우물 위로 올라온다. 몰록의 지하도시는 각종 기계류로 가득 차 있고, 이 기계들은 엘로이 도시를 탈없이 돌아가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들 기계를 계속 운영하는 이는 바로 몰록. 그들은 쾌락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채 그저 노동에만 종사한다.

주인공은 엘로이의 도시에 남아있던 고대기록을 살펴보고는 엘로이가 다름 아닌 유한계급, 몰록은 노동계급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한계급과 노동계급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각자의 방향으로 사회적 생체적 진화를 거듭한 결과 이같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유한계급은 의식주가 완벽히 보장된 생활을 계속하면서 모든 지적활동으로부터 퇴화돼 버렸고, 반면에 지하에서 노동에만 종사해온 노동계급은 빛을 무서워하는 존재가 된 채 타성에 젖은 노동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끔찍한 사실은 몰록들이 엘로이들을 '사육'하고 있다는 점. 지하에서 생활하는 몰록들은 언제부턴가 엘로이들을 잡아 식량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은 아득한 미래세계에서 인류문명의 황혼기를 목격하고 있다는 비감에 젖는다. 위너와 함께 엘로이의 선조들이 남긴 궁전을 다녀오는 도중에 주인공은 숲속에서 몰록들에게 포위당하자 성냥불을 당긴다. 불은 크게 번져 온 숲을 불태우고, 몰록들은 물론 주인공도 필사적으로 달려 겨우 화마를 벗어나지만 불행하게도 위너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낙심에 빠진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가 지하통로가 열려있는 것을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타임머신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것은 몰록의 함정이었다. 다행히 그는 몰록들에게 사로잡히기 직전 겨우 타임머신을 타고 출발하는데 성공한다.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은 친구들에게 시간여행의 증거로 위너가 꺾어준 이제껏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종의 꽃을 내놓는다. 이렇게 주인공이 시간여행 얘기를 마친 후 친구들은 귀가길에서 그의 말을 '정교하게 게획된 거짓말'정도로 치부해버린다.

다음날 주인공은 다시 그의 집을 방문한 친구에게 좀 더 완벽한 준비를 갖춰 다시 시간여행을 떠날 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친구가 보는 앞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사라진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도록 이 시간여행가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젠 아무도 그의 애기를 믿으려하지 않지만 갈색으로 말라버린 이상한 꽃 한송이는 여전히 남아있다.

◆20세기 세계지성의 대부 H.G. 웰스

웰스는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우주전쟁'이나 '타임머신' 같은 고전 SF작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는 20세기 세계지성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문명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로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적 소양에 두루 통달한 흔치않은 석학이었다. 그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때부터 사회평론가이자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해 어떤 의미에서 '20세기 전반이후 영국의 젊은 지성들은 모두 웰스의 유산'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다.

웰스는 '세계문화사대계'라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이 역작을 일본어판으로 읽으며 세계에 대한 이해를 키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저작물은 아직 한국어로

완역되지 않았다. 이를 포함해서 웰스가 남긴 거대한 작품세계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지성사에 큰 공백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웰스는 프랑스의 주울 베르느와 함께 SF문학의 개척자로도 손꼽힌다. 그러나 베르느가 주로 발명과 모험에 비중을 둔 반면, 웰스는 자신의 SF소설들에 날카로운 문명비판과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담아왔다. 타임머신은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이 극단적으로 수렴된 미래세계를 묘사한 것이고, '우주전쟁'은 강대국들이 아프리카 등지를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은유한 것이다.

웰스는 페이비언협회에 가입해 사회주의 이념을 펼치고자 노력했으나, 2차대전 발발 뒤 인간사회에 대한 총체적 절망에 휩싸인 채 작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는 1884년 런던에서 창립된 정치사상단체로 의회민주주의적 방법을 통한 사회주의 이념의 점진적 실현을 추구했다. 저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와 사회주의 경제학자 시드니 웹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웰스는 이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쇼를 비롯한 온건론자들과 대립 끝에 탈퇴하고 만다.

1866년 웰스는 평범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뛰어난 학업능력을 발휘해 켄싱턴 왕립과학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 당시 저명한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멋진 신세계'의 작가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의 지도를 받았다. 1895년 타임머신을 발표한 뒤 한동안은 SF작가로 활동하다 주류문학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보여 많은 걸작들을 양산해냈다. 그래서 웰스는 SF계는 물론 주류문학계에서도 영문학사상 주요 작가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본주의 풍자: 시간여행 SF물 효시

타임머신은 오늘날 그 제목자체가 시간여행장치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져버렸다.

이점은 이 작품이 현대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준다. 그러나 시간여행이라는 아이디어는 타임머신 이전에도 제시된 적이 있다.

웰스가 타임머신을 발표한 해는 1895년인데, 그보다 앞선 1889년에 미국에서는 '톰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이 '아서왕궁의 코네티컷 양키'라는 장편을 발표했고, 그 전년인 1888년에 기자 출신인 미국 작가 에드워드 벨라미가 '회고:2000년에서 1887년까지'라는 걸작을 낸 바 있다. 이 두 작품은 타임머신처럼 현재 시점에서 본 과거나 미래의 모습을 묘사하고, 비록 타임머신과 같은 수준의 과학적인 설명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주인공이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일반 대런던의중들은 대개 타임머신에서 보여주는 시간여행에만 관심을 보일뿐, 이 작품에 담겨있는 깊고 날카로운 사회비평적 의미는 대부분 간과하기 쉽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의미란 무엇일까.

타임머신에서 80만여년이라는 아득한 미래에 인류는 극단적인 두 부류로 나눠져 있다. 삶에서 아무런 생산적인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그저 먹고 놀기만 하는 사람과 어두운 지하에서 기괴한 행태와 몰골로 오로지 노동에만 종사하는 사람.

웰스가 태어나고 성장한 19세기 후반은 산업혁명 이후 대규모 생산과 노동이 한창 일어난 시기였다.

당시 영국은 전세계에 식민지를 두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지칭하는 최강대국이었고 과학과 산업 전분야에 걸쳐 최첨단의 길을 걷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자본과 노동계급의 분화가 사실상 맨 먼저 이루어졌다. 웰스는 그러한 사회의 미래상이 어떤 불길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예리한 통찰력으로 꿰뚫어 본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타임머신은 시간여행을 다룬 SF물의 효시격이 돼 숱한 후배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지만, 작품이 원래 의도한 바는 일종의 사회 풍자였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아서왕궁의 코네티컷 양키'나 '회고'도 시간여행의 아이디어만 빌려왔을뿐 그 본령은 사회풍자나 비평에 두고 있다. 시간여행은 시행착오와 발전의 축적과정인 역사성을 거스르고 한 순간에 사회를 조망해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는 과학의 발달이 인류사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인 만큼, 웰스의 타임머신을 넘어설 수 있는 장대하고 심오한 시간여행소설이 나오기를 기대해보자.

박상준(SF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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