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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7월 27일 1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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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잡지에서 보던 노브라의 여성이 어느새 서울 한복판을 활보하고 있다. "저럴 수가...."하던 처음의 당혹감도 차차 누그러져 '감상'의 눈길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미니스커트가 처음 이땅에 첫 선을 보일 무렵 그랬듯이 유행이란 저항하려 해도 일단 추세를 타게 되면 거절하기 힘드는 것. 비난-수긍-찬양으로 이어지는 유행의 3단계 중 노브라는 벌써 두번째 수긍의 단계까지 접근했다는 전문가의 풀이다.
노브라 패션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것은 '프랑스'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랭'. 하지만 대대로 한복을 입어온 한국 여인네들이야말로 일찍이 노브라를 실천해온 선구자인 셈이다. 브래지어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양장이 들어오면서부터 즉 해방이후의 일이니 불과 30~40년 사이에 해당한다. 이제 다시 노브라로 되돌아가게 된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얘기되고 있다.
우선 의복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옷을 잘 차려 입음으로써 옷을 통해 일종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는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입어서 편한 것만을 추구하게 되었다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추세라는 것.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이고 보면 옷의 압박에서만이라도 해방되고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레서 탄생된 것이 입어서 또 보아서 편안한 루즈(헐렁한 옷차림)이고 노브라라고 한다.
그런데 편한 것으로 내세우는 이면에는 남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그리고 여성의 심리와 의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만큼 남성과 동등하고자 원하는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노브라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등 풀이도 갖가지다. 의학적으로 본다면 노브라는 앞가슴의 압박이 사라지니 혈액순환에도 좋을 테고 피부와 공기유통이 잘되어 땀띠 등 브래지어의 부작용도 제거된다고 한다.
그러나 노브라를 즐기는 여성이 기억해두어야 할 일이 있다. 즉 몸매가 옷맵시를 만든다는 생각은 오산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옷 입기에 따라서 아름다운 신체가 만들어질 수 있으니 노브라를 계속하다간 앞가슴이 늘어질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의상디자이너들은 경고한다. 그리고 가슴이 밋밋한 여성 또 가슴의 곡선미가 사라진 중년이상은 스스로 자제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또한 직장여성이 비치는 블라우스에 노브라 차림으로 의상공해를 일으킨다면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지. 하지만 일부 남성측에선 브래지어에 의한 가짜가 아닌 노브라의 진짜 곡선을 은근히 환영하고 있는 눈치다.
어깨선을 드러낸 여성 사진을 곁들인 이 기사 중의 몇몇 표현들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격세지감을 느끼게도 하는군요. 인류 최초의 브래지어는 이브의 나뭇잎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브래지어는 가슴을 과시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
기원전 2500년경 크레타 섬의 미노아 여인들은 드러낸 가슴을 치켜올려 옷 밖으로 드러내는 브래지어를 사용했지요. 가급적 유방을 크게 보이고, 과시하려고 그랬던 겁니다. 혹시 `계집 못된 것이 젖퉁이만 크다'는 우리 속담을 기억하시는지. 요즘도 `유방 큰 여자는 머리가 나쁘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있지요. 이런 거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여간 남자들은 참 못됐습니다.
그리스 남자들은 좀 음흉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 그리스의 남성들은 여성의 유방을 자신들이 좋아하는 둥근 형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어냈습니다. 대표적인 게 오늘날의 브래지어와 비견할만한 '스톨로피온'이란 물건이었습니다.
반면 로마 여성들은 유방을 되도록이면 작게 보이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래서 가슴에 밴드를 감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소녀들과 젊은 처녀들은 유방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파시카 펙트랄리스'는 일종의 브래지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르티알이란 사람은 자신의 저서 '아포포레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브래지어여, 네 여주인의 젖가슴을 강하게 조여주어라. 그래서 내 손이 한번에 그것을 쥐고 만질 수 있도록."
▼요즘 브래지어의 시작은 두 장의 하얀 손수건과 짧은 끈이었다.▼
19세기가 되자 프랑스 파리에는 '팔시'라는 이름의 일종의 유방 패드가 나타났습니다. 이 '팔시'라는 물건은 가슴을 풍만하게 보이기 위해 고안된 울 패드였습니다. '팔시'가 출현한 뒤로 프랑스 여성들은 고무로 만든 가슴 패드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름도 재미있습니다. 일명 '레몬 가슴'이라고 했는데 모양과 크기에 빗대어 그렇게 붙였다는군요. 패션의 역사는 `가리고, 보여주고'의 역사라는데 과연 브래지어 하나만 봐도 증명되는군요.
브래지어가 본격적인 여성 언더웨어의 아이템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입니다. 당시에도 사교계의 여인들은 여전히 코르셋과 고무 패드로 중무장하고 지냈습니다. 코르셋은 고래수염과 끈으로 만들었는데 몸을 꽉 조여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지요. 또 가슴에는 고무 패드를 착용했으니 고생이 여간 아니었을 겁니다.
브래지어가 세상에 나오게 된 데는 뉴욕에 살던 메어리 펠브스 야코브스라는 여자의 공이 컸습니다. 1913년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값비싼 파티복을 구입한 그녀는 속이 비쳐 코르셋의 윤곽이 드러나는 이 옷에 두 장의 하얀 손수건과 리본, 그리고 끈으로 뒤가 없는 짧은 브래지어를 만들어 착용했습니다. 내친 김에 브래지어 특허를 낸 야코브스는 직접 브래지어를 만들어 팔다 장사가 안 되자 1,500달러에 코르셋의 디자이너에게
특허권을 넘겼습니다. 오늘날의 브래지어는 이렇게 탄생한 거죠.
스폰지 컵의 브래지어가 처음 세상에 선보인 것은 1916년이었습니다. 제조사는 영국의 제어거사였지요. 제어거사는 이 물건의 이름을 브래시어라고 붙였습니다. 어깨끈이란 뜻이지요. 이게 미국에서는 브래지어, 일본에서는 브라자가 됐어요. 한국 아주머니들은 아마 부라자라고 하지요?
▼노브라는 한때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이었다. ▼
이런 브래지어를 벗어 던진 노브라 패션이 처음 나타난 것은 60~70년대였는데, 페미니즘 운동과 저항문화와도 한 부분 연관되어 있지요. 당시 강성 페미니스트들은 브래지어와 코르셋, 거들을 불에 태우는 화형식도 가졌습니다. 이후 마돈나는 브래지어를 가슴 밖에 착용하는 이른바 란제리 룩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이목을 끌게 되지요. 장 폴 고티에라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인데, 사실은 수천년 전 그리스인들의 아이디어와 별로 다를 게 없지요?
요즘의 신세대 가운데는 `대대로 한복을 입어온 한국 여인네들이야말로 일찌기 노브라를 실천해온 선구자' 라는 구절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구한말 때 서양 선교사들이 찍은 흑백의 자료 사진을 본 기억이 있으신지. 그 사진들을 보면 조선 여성들이 짧은 저고리 밑으로 가슴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요? 자료사진 속의 그 여인들은 서민층이었습니다. 양갓집 규수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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