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국군포로 가족상봉

  • 입력 2000년 7월 20일 18시 21분


6·25전쟁의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6월8일, 유엔군측과 공산군 대표단은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협정을 체결했다. 양측은 협정에서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모든 포로를 휴전이 성립된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족과 고향이 있어도 자신이 싫어하는 이념과 정치체제가 지배하기 때문에 돌아갈 의사가 없는 포로가 문제였다. 유엔군측이 수용하고 있던 17만1000여명의 포로 중 약 5만명이 공산국가로 송환되기를 거부했다. 양측은 송환 의사가 없는 포로에 대해서는 90일간의 설득 기간, 30일간의 재설득 기간을 두어 중립국감독위에 맡기기로 타결지었다.

▷포로송환 협정에 대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공산군 포로 가운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한국의 ‘애국 청년’을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전국 각지에 수용돼 있던 이른바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 관할 아래에 있던 3만7000여명의 공산군 포로 가운데 2만7092명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미군 감시원이 곳곳에서 저지하려 했지만 ‘반공’을 앞세운 한국 군경(軍警)에 중과부적이었다. 일부 충돌까지 벌어져 한미간 갈등 문제로 비화됐고 세계적 뉴스가 되기도 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북한에 국군포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미 사회주의화 학습 등을 통해 북한의 공민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자유의사에 따른 선택 과정이 있었는지 여부가 문제다. 남한의 반공포로 석방은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국군포로의 북한 공민화 과정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더구나 국군포로들은 거의가 아오지탄광 같은 열악한 일터에 보내지거나 심한 경우 교화소에 수감되기도 했다는 것이 생환 포로와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이번 8·15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북측이 제시한 명단은 1명의 재일동포를 제외하고는 모두 월북자이고 그중 상당수가 인민군 의용군출신이다. 북측 의용군출신은 남한의 가족과 만나게 되는데 국군포로가 가족 상봉을 못한다면 이는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다. 국군포로 들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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