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괴뢰'

  • 입력 2000년 7월 2일 21시 22분


괴뢰란 독립적인 인격이나 주권을 갖지 못하고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비하하는 말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남한에 대해 무조건 ‘괴뢰’라는 말을 모든 호칭의 접두어처럼 사용해 왔다. 남조선 괴뢰도당이니, 괴뢰통치배 같은 말이 그것이다. 남한도 북한을 괴뢰라고 칭한 것은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는지 가리기는 어렵지만 양쪽에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였으니 분단을 상징하는 말인 셈이다.

▷대표적인 괴뢰정권으로 2차대전 기간인 1940년 7월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패한 뒤 들어선 ‘비시 프랑스’를 들 수 있다. 나치는 광천수가 솟는 아름다운 도시 비시에 프랑스 의회를 소집해서 독일에 협력하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흔히 그렇듯이 괴뢰정권의 국가수반으로도 국민적 신망이 필요했다. 비시 정권은 1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영웅인 필립 페탱 원수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의회는 당시 84세이던 노장군에게 569 대 80이라는 압도적 다수지지로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페탱은 독일과 협력해야 더 이상의 전쟁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독일의 앞잡이 노릇을 하려 했을 때 그를 해임했고 항독 레지스탕스를 배후 지원하는 이중적 처신도 보였다. 2차대전이 끝나 파리가 해방되자 괴뢰정권 관련자들을 처단하라는 당연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페탱은 나치에 의해 독일로 납치돼 갔지만 자진해서 프랑스로 돌아가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괴뢰’에 대한 국민지탄은 냉엄했고 그는 독방 종신형에 처해져 95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죽었다.

▷북한은 남한을 심리전(心理戰)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괴뢰라는 말 이외에도 극렬한 상투어들을 구사해 왔다.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북한은 남한에 대해 괴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모든 호칭을 정상화했다. 이에 따라 우리 국방부도 똑같은 상호조치를 취했다.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이 만나 민족의 공존공영을 논의해 나가기로 한 마당에 당연한 일 같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는 ‘괴뢰’와 같은 말로 서로를 헐뜯는 상황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남북 양측이 명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김재홍 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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