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귀족' 좌석버스 ⑫를 아시나요

  • 입력 2000년 6월 29일 21시 37분


“올여름엔 체크무늬 7부바지가 인기네. 슬리퍼 운동화에다가.”

김민정양(21·이화여대 영문3)은 12번 좌석버스 승객들의 옷차림만 눈여겨봐도 계절별 유행을 짐작할 수 있다.

계절학기 수강이 있어 매일 강남구 대치동 집에서 개포동까지 걸어가서 12번을 타는데 방학이라고 해도 절대 옷을 아무렇게나 입지 못한다. 12번 좌석버스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강남∼강북 황금노선 운행▼

이 버스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을 출발, 선릉역 강남구청을 거쳐 압구정동 갤러리아, 현대백화점과 시청앞 이화여대앞 연세대앞을 지난다. 그야말로 서울 도심의 ‘로열 노선’만을 경유하는 탓에 12번 좌석버스엔 일찌감치 ‘노블리안 버스’ ‘신촌 스쿨버스’ ‘이대 리무진’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신촌으로 통학하는 강남 거주 대학생과 쇼핑을 즐기는 20, 30대 주부, 역삼동 서울벤처밸리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이 버스의 주고객층.

“쭉 압구정동에서 살았어요. 현대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다니면서도 12번, 졸업후 국민은행 논현동지점에 입사해서도 12번, 벌써 7년 정도 이 버스를 탔네요.”

손해용씨(26·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말. “동창생 등 낯익은 사람들이 많아 다른 사람이야기를 할 때는 앞뒤좌우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김민정양이 옷을 아무렇게나 입을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자승객 많아 "여탕버스"▼

12번 좌석버스에선 시간대와 상관없이 유독 소품을 많이 볼 수 있다. 여대생들의 바이올린(그것도 학교배지를 부착한!)이나 미술도구, 현대 갤러리아백화점 로고가 찍힌 주부들의 큼지막한 쇼핑백, 남자대학생들의 음악감상용 MP3와 백폰, 직장인들이 손에 든 타임이나 영자지….

출퇴근시간대에도 잠을 자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음악을 듣든, 책을 보든, 새치름히 창 밖을 내다보든. 표정은 거의 임전무퇴, 완전무장 태세. 때때로 서로를 의식하는 듯한 표정이 교차하고.

남학생들 사이에 ‘여탕버스’라고도 불릴 만큼 여성승객 비율이 높은 것도 특징. 26일 오전 9시대 승객 44명 중 30명, 낮 12시대는 24명 중 무려 19명, 퇴근시간 직전인 5시 30분경에는 32명 중 23명이 여성이었다.

강남의 백화점을 오가는 셔틀버스로 12번 버스를 이용한다는 주부 박세미씨(34·서울 서대문구 연희동)는 “전용차로 덕분에 강남을 오가는 데 택시보다 더 빠르고 싸고 시원해 좋다”고 말했다.

운전기사 안대용씨(40)는 “10명 중에 예외 없이 7명은 여자 승객들”이라고 했다.

“우리 차는 자정 넘어서까지 다녀요. 다른 버스들보다 20분 정도 더 다니는 거죠. 여성분들은 특히 밤엔 택시보다 버스가 안전하다고 생각해선지 많이 타는 것 같아요.”

▼8학군→명문대→벤처밸리로▼

12번 버스 승객 중엔 이 버스에 오랜 ‘충성도’를 보이는 단골이 적지 않다. 강남 8학군 출신이 명문대에 진학하고 졸업 후엔 서울벤처밸리 등 강남의 직장이나 아파트에 자리잡는, ‘사회계층의 고착화’를 보여주듯.

대중문화평론가 조장은씨(천리안 go j&j 시솝)는 “8학군, 신촌근처 대학출신 등의 종합적 이미지가 공교롭게 ‘12번 버스’라는 이름으로 대변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각종 인터넷 채팅사이트 대화방명이나 온라인 카페이름으로 ‘12번 버스’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사회학자 홍성태씨는 “대중소비사회가 되면서 외관상으로 ‘나는 특별한 사람’이란 것이 드러나지 않는 수가 많다. 이 경우 자신들을 구분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폐쇄적인 자신만의 커뮤니티를 만들려는 경향이 많다”며 12번 버스도 그 중의 하나라고 분석한다.

12번 버스를 타는 이들이 이 버스 승객으로 ‘선택’받은 것에 대해 각자가 ‘의식’을 하고 있다면 12라는 숫자는 더 이상 단순한 버스노선이 아니다.

90년대의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처럼 하나의 문화기호, 그것도 움직이는 기호로 전이된 것이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

▼단골승객 정슬향씨▼

“일산에서 강남구 압구정동 ‘씨네플러스’ 영화관까지 한시간이면 충분해요.”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사는 정슬향씨(24·한성대 화학과 4)는 “군더더기 정류장을 안서고 한번에 가니까 안막히면 20분 정도에 신촌에서 강남까지 간다”고 말한다.

이렇듯 12번의 노선특성상 단골승객들 중에는 일산 주민들이 꽤 많다. 일산에서 강남을 대중교통으로 한번에 가려면 지하철 3호선을 1시간 이상 지루하게 달리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 그래서 일단 일산서 가까운 이화여대나 연세대 앞으로 온 다음 12번을 갈아탄다.

신촌엔 773번 등 강남으로 향하는 몇개의 버스가 더 있긴 하지만 빙빙 돌아가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분당에선 영등포나 여의도까지 가는 직행좌석이 있는데 일산에는 강남으로 가는 버스편이 없어 불편합니다. 수요가 많은데 왜 설치가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정씨는 어쨌든 일산에서 강남 가기는 원천적으로 힘겨운 길이라고 덧붙였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

▼20년 역사 들춰보니…▼

■8학군 성장과 밀접

12번 좌석버스의 역사는 서울 8학군의 ‘성장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영교통 이기호 총무과장의 말. “1980년 2월부터 91년까지는 강남구 도곡동에서 시내 중앙청까지만 운행했어요. 그런데 구정고 현대고 개포고 숙명여고 같은 8학군 고교

출신들이 신촌부근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계속 높아지면서 학부모들로부터 신촌까지 운행해달라는 민원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처럼 신촌일대 대학을 지나가는 노선으로 연장하게 된 거지요.”

■72, 73년생 대학진학 맞물려 12번 좌석버스가 신촌까지 ‘진출’한 시기는 1972, 73년생의 대학진학 시기와 맞물린다. 이들이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다니던 80년대는 ‘8학군 바람’이 거세던 시절.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좀더 열성적인 엄마들이 일찍 강남으로, 강남으로 이사하던 시기였다.

■‘12번 CC’를 아시나요

92년부터 12번 좌석버스는 8학군 고교는 물론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경기대 단국대를 두루 지나가면서 ‘스쿨버스’란

별명을 얻게 됐다. 대학생 커플로 이루어진 ‘12번 CC’들은 아침 출근시간대에 서소문과 무교동, 한남대교까지 극심한 정체를 보일 때면 남산 1호터널 대신 남산 뒷길로 돌아가는 길에서 드라이브 재미를 만끽하기도.

■1000원과 1100원 사이

1000원짜리 구형과 1100원짜리 신형이 반반 운행되고 있지만 팔다리 뻗을 면적 넓고, 에어컨까지 ‘빵빵한’ 1100원 버스를 굳이 기다려 타는 이가 많다. 강남구 개포동∼마포구 성산동인 지금의 노선으로 확정된 것은 8년 전. 다른 버스들이 3∼5년에

한번씩 시의 허가를 받아 부분적으로 노선을 개편하는 것에 비하면 꽤 장수하는 편이다. 이 때문에 버스업계에선 이 버스가 특정노선에 집중돼 ‘특혜’를 받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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