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재천/공개와 참여의 정책수립을

  • 입력 2000년 6월 25일 19시 41분


나는 종종 대학에서 의예과 학생들에게 일반생물학을 가르친다. 본과에 가면 신물이 나도록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잠시 쉬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나는 좀 혹독한 요구를 하는 편이다. 아무리 하찮은 실수라도 정신의 해이를 엄하게 다스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인간의 생명을 다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직업 중 어떤 의미로는 성직자보다도 더 신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의 곁을 떠나 속물들의 흙탕물에 뛰어들었다. 의약분업이 아무리 제대로 준비된 제도가 아니었더라도 생명을 외면한 그들의 태도는 그들 자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날까지 마치 불치병처럼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생명은 수로 가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나가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끊어진 단 하나의 생명에도 그들의 업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겁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들을 거리로 내몰아야 했던 정부의 무지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환경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공개와 참여’ ‘대화와 타협’ ‘인내와 끈기’의 3대 원칙에 따라 환경을 지켜가겠다고 선언했다. 생명을 담보로 인술을 내동댕이쳤던 의사들도 문제지만 생명을 볼모로 채찍부터 손에 쥐는 정부가 과연 위에 언급한 3대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소양을 갖췄는지 의심스럽다.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동강댐 계획도 결국 백지화하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3대 원칙’에 따랐더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사업이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한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이번에 보건복지부가 의약분업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며 어쩌면 그렇게도 건설교통부가 해오던 스타일과 흡사할까 그저 놀라울 뿐이다. 댐을 건설하면 동강의 생태계가 무너진다는 생태학자들의 ‘사망진단서’를 받고서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것과 의료대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명백하게 밝힌 의사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처사는 판에 박은 듯 똑같다.

어찌 그뿐이랴. 대학의 손을 꽁꽁 묶어놓은 채 늘 ‘선시행 후보완’ 형태로 밀어붙인 입시정책으로 인하여 드디어 폭발해버린 교육대란은 또 어떤가. 의사들을 집단이기주의자들로 싸잡았듯이 교사들을 개혁의 저항세력으로 몰아붙여 교권을 땅에 떨어뜨리고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교수들을 상아탑에 올려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가두려 해서는 학문의 발달을 기대하기 어렵고 국가의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

미국의 교육부는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기에 앞서 우선 하버드대 총장을 면담한다. 예일대와 스탠퍼드대 총장의 동의를 구한다. 대학 총장들이 교육부가 쥐고 있는 사탕을 입에 넣기 위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더 무엇을 기대하랴.

의료대란은 앞으로 정부와 시민단체 그리고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온갖 집단들 사이에 벌어질 수많은 갈등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타협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대통령 자신이 평양에서 솔선하지 않았는가. 김정일위원장과 이뤄낸 아름다운 인내의 대화가 정작 나라 안에서는 왜 이렇게 어려워야만 하는가.

정부가 주도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식의 낡은 정치가 21세기에도 먹히리라고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공무원 한 두 명의 책상머리에서 기안된 정책을 하달하는 식이 아니라 계획단계에서부터 전문가들과 당사자들은 물론 시민 대표들도 모두 참여시켜 대화하는 연습을 하지 않는 한 앞으로 우리 삶에는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이제 의사협회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약사협회의 반발을 어찌할 것인가. 처음부터 ‘공개와 참여’의 원칙에 따라 의사협회와 약사협회, 그리고 정부와 소비자 대표 즉, 국민이 한자리에 앉아 얼마나 오랫동안 심각하게 논의했는지 묻고 싶다.

동강댐 사업, 의약분업, 그리고 교육공황 등에는 일맥상통하는 교훈이 있다. 저질러 놓고 허락해 달라는 식의 억지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같이 고민하며 함께 풀어야 한다. 환경정책을 위해 발표한 대통령의 3대 원칙을 정부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업무에 기본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최재천(서울대·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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